『희년신앙』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유
13.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 자본주의 바깥 어둠속으로 쫓겨나라.
마태복음 25:14-28, 25:29-30
본문읽기 1. 마태복음 25:14-28
참으로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자기 소유 자산들을 맡긴 경우’와 같다. 그는 각 사람에게 제 능력에 따라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났다.
즉시,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마찬가지로 두 달란트 맡은 종도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떠나와서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은화를 묻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함께 셈을 했다. 다섯 달란트 맡았던 종이 나아와서 다섯 달란트를 더 내어놓고 말했다.
“주인님, 저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제가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 종의 주인이 종에게 말했다.
“잘했다. 착하고 믿음직한 종아!
네가 작은 것들에 믿음직했으니
내가 더 많은 것들 위에 너를 세우겠다.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
두 달란트 맡았던 종도 나아와서 말했다.
“주인님, 당신이 저에게 두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제가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 종의 주인이 종에게 말했다.
“잘했다. 착하고 믿음직한 종아.
네가 작은 것들에 믿음직했으니
내가 더 많은 것들 위에 너를 세우겠다.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
그러나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은 나아와서 말했다.
“주인님, 나는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모진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은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 추수하는 사람이고
키질도 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알곡을 모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하면서 떠나와 땅에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것을 차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종의 주인이 대답하여 종에게 말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 추수하고
키질도 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알곡을 모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더란 말이냐?
그렇다면, 너는 내 은화들을 은행가에게 맡기는 것이 마땅했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은행가로부터 이자와 함께
내 것을 돌려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그 자로부터 한 달란트를 빼앗아라.
그래서 너희는 그것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본문읽기 2. 마태복음 25:29-30
참으로, 누구든지 가진 자에게는 더 많이 주어져서 넘쳐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그 자신으로부터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쓸모없는 종을 더 바깥 어둠 속으로 내어쫒아라.
거기서 울며 이를 악묾이 있을 것이다.
본문 이해하기
돈이란 무엇일까?
교과서적으로 말하면 돈이란, 첫 번째 상품을 교환하는 매개수단이다. 하지만 근대산업사회 이후 돈의 기능은 사람의 쓰임과 필요를 교환하는 역할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의 노동까지도 상품화하고 거래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두 번째, 돈은 사람의 모든 쓰임과 필요에 대한 가치척도로써 사람의 노동에 값을 매기고 지불수단역할을 한다. 세 번째 돈은 사람의 쓰임과 필요 그리고 사람의 노동을 지배하고 독점한다. 사람의 필요와 쓰임 그리고 노동까지도 쌓고 재생산 할 수 오직 유일한 수단이다.
사실 돈이 사람의 쓰임과 필요를 교환하고 사람의 노동을 매개하는 도구에만 머문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 정도로는 사람들의 삶에서 그렇게 큰 힘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돈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인간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돈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마력(魔力)을 드러냈다. 돈이 사람의 쓰임과 필요를 교환하고 매개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삶 자체를 지배하는 권력으로 그 모습을 바꾼 것이다.
이러한 돈의 권력의 밑바탕은 곧 ‘사람의 쓰임과 필요 그리고 사람의 노동에 대한 지배와 독점과 쌓음’이다. 아마도 맨 처음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사람의 쓰임과 필요 그리고 사람의 노동에 대한 지배와 독점과 쌓음이 마땅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돈은 인간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독점하며 쌓는 권력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제 돈은 스스로 지배와 독점과 쌓음(또는 자본화)을 재구조화(再構造化)한다. 돈을 홀로 세상의 모든 재화를 독점지배하고 쌓으며 초과소비(전쟁)하는 맘몬․자본 하나님으로 진화했다. 21세기에 이르러 돈은 단순하게 사람의 쓰임과 필요와 노동을 교환하는 도구 그 이상의 것이 되었다. 돈은 우리의 삶이고 우리 삶의 보람이며 우리의 인생목적이다. 그래서 돈은 언제, 어디서든지 사람의 삶과 인생목적을 폐기처분할 수 있는 죽음의 권력이다.
21세기 금융시스템을 향한 집단무의식을 깨우다.
그렇다면 21세기 맘몬․자본세상 금융시스템 속에서 돈이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에서 돌아다니는 모든 돈을 그 성격에 따라 분류한다. 이것을 ‘통화지표’라고 부른다. 한국은행이 분류하는 주요 통화지표들은 ‘화폐발행액, 본원통화, 협의통화(M1), 광의통화(M2), 금융기관유동성(Lf), 광의유동성(L)이다. 이 통화지표들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먼저, ‘화폐발행액’이란? 우리 손으로 만지고 사용하는 돈으로써 유통수단 또는 지불수단으로 사용되는 법정화폐다. 법정화폐는 크게 봐서 가계나 기업 등 민간이 가지고 있는 현금과 은행이 가지고 있는 돈(시재금)으로 나눌 수 있다. 이때 민간이 가지고 있는 지폐나 동전 등을 ‘현금통화’라고 한다. 법정화폐는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도는 모든 돈의 5%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우리나라 전체 돈의 크기에 비하면 3%미만에 불과하다. 2025년 5월말 우리나라 현금통화는 175.44조원이다.
두 번째, ‘본원통화’란? 우리나라에서 도는 모든 돈의 종자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은행 ‘법정화폐’는 은행들을 통해서 가계나 기업 등 민간에 공급된다. 은행들은 한국은행으로부터 받은 돈의 대부분을 대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민간에 흘려보낸다. 하지만 일부 돈은 은행고객들의 지급요청에 대비해서 남겨두는데 이 돈을 ‘시재금’이라고 부른다. 민간도 은행으로부터 대출 등을 통해서 넘겨받은 돈의 5%정도는 현금으로 직접 사용한다. 하지만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돈은 다시 예금형태로 은행에 모여지게 된다. 이때도 은행들은 고객의 예금출금에 대응하기 위해 예금액의 1% 정도를 무조건 한국은행에 예치해야 한다. 이것을 ‘지급준비예치금’이라고 한다.
이렇듯이 ‘본원통화’는 ‘한국은행 화폐발행액 + 은행시재금 + 지급준비예치금’을 합친 돈을 말한다. 2024년 5월말 기준 우리나라 본원통화 잔액은 277.73조원이다.
세 번째, 협의통화(M1)란? 가계나 기업 등 민간이 가지고 있는 현금통화와 은행의 예금통장에 들어 있는 돈을 말한다. 협의통화는 이렇게 ‘현금통화 + 가계 보통예금과 기업당좌예금 등 통장에 들어 있는 돈’으로써 언제든지 꺼내서 현금으로 쓸 수 있는 돈이다.
네 번째, 광의통화(M2)란?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현금으로 꺼내 쓸 수 있는 돈이다. ‘협의통화’에 더하여 2년 미만의 정기적금과 금융기관발행채권 그리고 개인종합자산관리통장 등 통화성 금융상품을 합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광의통화는 ‘현금 + 보통예금 + 2년 미만의 적금 통장이나 증권저축․채권․어음 등 통화성 금융상품’ 총액이다. 우리나라에서 도는 모든 돈의 총량을 말한다. 2024년 5월말 우리나라 광의통화 잔액은 4,009.36조원이다.
다섯 번째, 금융기관유동성(Lf)이란? 글자 그대로 금융기관들의 유동성을 말하는데 금융기관들의 금융상품들 가운데 당장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돈의 총량이다.
여섯 번째, 광의유동성(L. Liquidity Aggregate)이란? 그야말로 우리나라 모든 돈에 대한 전체합계를 말하는데, 모든 금융기관들의 모든 금융상품 유동성의 총량이다.
21세기 금융시스템 속에서 거의 모든 돈은 파생통화 곧 숫자다.
이처럼 우리나 전체 돈의 3%미만만 진짜 돈(법정화폐발행액)이다. 금융시장에서 돈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본원통화’와 비교해도 우리나라에 돌아다니는 전체 돈의 95%정도는 진짜 돈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전체 95% 돈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파생통화’인데, 우리 손으로 만지고 사용하는 실제화폐가 아닌 숫자로만 존재하는 돈이다. 통장에 찍힌 숫자와 은행대출 장부 적힌 숫자 그리고 어음 등 금융시장에 돌아다니는 모든 돈은 대부분 다 ‘파생통화’다.
그렇다면 이 파생통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은행들이 이자와 이윤을 통하여 본원통화라는 종자돈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어마어마한 파생통화를 만들어 낸다. 이때 은행들은 ‘본원통화’의 흐름을 통한 가계와 기업 등 민간으로부터 예금을 받아 1차 대출을 일으킨다. 이어서 대출금의 은행예치 등 1차 대출금이 은행으로 흐르도록 유도해서 또다시 2차 3차 4차 5차 대출을 일으킨다. 이처럼 은행들은 여러 차례 거듭되는 대출경로를 통해서 은행고객들의 예금을 거듭해서 재창조한다.
이렇듯이 은행들은 이자와 이윤을 통하여 본원통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무한히 파생통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파생통화란, 은행들이 대출을 통해서 만들어 내는 돈인데 실제로는 ‘신용화폐 곧 빚’이다. 그러므로 ‘신용화폐 또는 빚’은 예금증서․어음․수표․채권․주식 등 수많은 형태의 신용증권(채권채무관계를 증빙하는 증서)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럼으로써 채권자와 채무자가 아닌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화폐처럼 흘러 다닐 수 있다.
이처럼 ‘돈이 돌고 도는 것’을 ‘금융(金融) 또는 화폐의 순환’이라고 한다. 한국은행이 법정화폐를 찍어내고 그래서 본원통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통화승수가 높아지면 신용통화 곧 빚이 커진다. 그러면서 물가가 올라가는 상황을 ‘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이럴 때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높이고 화폐발행량과 본원통화를 줄여서 인플레이션을 잠재운다.
실제로, 2024년 5월 말 현재 우리나라 본원통화(은행 종자돈)는 277.73조원인데 × 통화승수 14.436배로 돌고 돌아서 = 신용통화(실제 돈) 4,009,36조원 만들어냈다.
이렇듯이 사람들의 호주머니와 통장 속에 있는 모든 ‘돈의 실체’는 ‘신용통화’로써 누군가의 ‘빚’이다. 한마디로 지금, 내 호주머니와 통장에 있는 모든 돈의 실체는 ‘은행이 만들어 낸 신용통화로써 누군가의 빚’이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어야 할 것은 ‘빚 또는 신용화폐는 반드시 이자와 이윤을 먹고 돌고 돈다’는 사실이다. 더해서 확실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이자와 이윤이라고 따로 표시 된 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롯이 한국은행은 통화(법정화폐)만을 발행하기 때문이다.
‘이자와 이윤이라는 명목의 화폐’는 없다.
실제로 21세기 금융시스템 속에서는 ‘이자와 이윤이라는 명목의 통화(또는 화폐)’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에서도,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이자와 이윤이라는 이름표를 단 화폐를 찾을 수 없다. 오롯이 21세기 금융시스템 속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자와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시나브로 자기 호주머니 속 화폐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 또한 이자와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들의 호주머니 속 화폐를 빼앗는다. 이렇듯이 대한민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2천8백여만 풀뿌리 사람들은 누구라도 서로의 호주머니 속 화폐쟁탈전을 벌이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21세기 빚 세상 경제체제 또는 금융시스템’ 속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빚을 지고 갚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워 채무노예로 삼았던 고대 신용사회’은 가고 21세기 빚꾸러기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본문풀이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 자본권력의 바깥 그 어둠속으로 쫓겨나라.
한 달란트 맡은 종의 삶의 프락시스
이제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어떻게 본문비유를 읽고 해석해야할까? 예수는 본문비유에서 로마제국 지배체제 자본권력의 ‘약탈횡포와 착취 그리고 무한축적 욕망의 실체’를 까발린다. 로마제국 지배체제 내부자 세력인 대상인들과 자본가들의 약탈횡포와 착취 그리고 축적욕망 기계구조의 실체를 실감나게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맘몬․자본권력의 착취․독점․쌓음의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에 끼인 노예인간군상을 검색한다. 노예인간군상의 삶의 마당을 그 모양 그대로 들춰낸다.
이렇듯이 예수는 맘몬․자본권력의 독점과 착취와 쌓음의 욕망을 폭로함으로써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을 증언하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본문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삶의 프락시스(행동양식)이다. 예수는 본문비유에서 청중과 독자들에게 맘몬․자본권력의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에 끼인 노예에서 탈출하라고 요청한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삶의 행동양식을 따라 배우라고 요청한다. 맘몬․자본세상 바깥 그 어둠속으로 쫓겨나라고 선동한다.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본문의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는 누가복음 19장의 ‘므나 비유’와 평행본문이다. 그런데 이야기 줄거리와 내용이 전혀 다르다. 따라서 일부 성서학자들은 ‘달란트 비유와 므나비유’의 출처가 서로 달랐을 거라고 주장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서 저자들이 서로 다른 자기들만의 문서자료에서 달란트비유와 므나비유를 따로따로 옮겨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어록에서 하나였던 비유를 저자들이 자기복음서에 옮겨 쓰면서 크게 고쳐 썼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저자는 자신의 신앙관점에 따라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상징과 관념의 메시아 종말론 하늘나라’로 표현했다. 나아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재림대망’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함께 셈을 했다’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본문비유읽기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진실을 제대로 살려서 찾아낼 수 있을까? 필자는 누가복음 ‘므나비유’에 비교해서 마태복음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읽기’를 통해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 본문비유의 내용을 차근차근 살펴보자.
“참으로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자기 소유 자산들을 맡긴 경우’와 같다.”
여기서 본문비유의 첫 문장을 좀 더 세밀하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비유의 첫 문장에서 ‘하늘나라’라는 주어가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유의 문맥을 따라 달란트비유를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유로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호스페르 ᾭσπερ ~ 한 경우와 같다’라는 비유의 첫 연결어에서 충분히 ‘하나님나라’라는 떠올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때 ‘호스페르’는 ‘호스 ώς ~처럼 + 페르 περ ~ 대하여’로 이루어진 연결어이다. 이러 할 때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맞대응하는 비유내용은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자기 소유 자산들을 맡긴 경우’다.
이처럼 예수의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의 문맥으로 보아 ‘하늘나라와 비유이야기 속 주인으로써 어떤 사람’은 서로에게 결코 직접적인 비유대상이 아니다. 비유이야기 속 주인과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과 비교해서 본문비유를 해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은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해석에서 생겨나는 커다란 오해다. 따라서 본문비유를 바르게 읽고 제대로 해석하려면 비유이야기 속 주인에 대한 ‘그리스도 재림신앙 알레고리 상상’을 멀찍이 밖으로 밀쳐놓아야 한다.
실제로 본문비유는 ‘휘파르콘타 ὑπάρρχοντα’ 소유 자산들’이라는 헬라어 낱말을 사용한다. 이 낱말은 ‘휘포 ὑπό ~아래 + 아르코 ἄρχω 지배하다’로 이루진 합성어다. 예수의 비유이야기 속 주인은 많은 자산을 홀로 독점하고 쌓으며 늘려온 독점 자본가이다. 대자본가로써 주인은 자신의 손아래 움켜쥐고 홀로 쥐락펴락 할 수 있는 독점자본권력의 소유자다.
그러므로 본문비유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비유이야기 속 ‘주인으로부터 많은 자산을 넘겨받는 종들의 삶의 행동양식과 그 결과물들’을 쫓아서 본문을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본문비유읽기에서 이런 해석태도를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저자가 ‘예수의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를 자기 복음서에 옮기면서 ‘그리스도 재림신앙 알레고리 상상’으로 덧칠해 놓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서구교회에서 본문비유를 ‘그리스도 재림신앙 알레고리 상상’으로 해석하는 전통을 튼튼하게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들을 이해하면서 이어지는 비유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주인의 달란트를 맡은 세 종이야기
“그는 각 사람에게 제 능력에 따라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났다. 즉시,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마찬가지로 두 달란트 맡은 종도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물러나와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은화를 묻었다.”
여기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은 세 명의 종들이 차례로 언급된다. 이렇게 예수의 비유이야기에서 차례로 세 명의 등장인물이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이때 앞선 두 명의 등장인물은 잇달아 서로관계 된 사건을 일으키거나 비슷한 행동을 한다. 반면에, 세 번째 등장인물은 앞의 두 명의 등장인물과는 전혀 다른 사건을 일으키거나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 이 경우, 예수는 마지막 등장인물이 일으키는 사건과 행동을 통하여 억세고 힘차게 비유의 은유들을 쏟아낸다.
이점에서 21세기 성서독자들은 ‘한 달란트 맡은 종이 일으키는 사건과 행동’을 쫓아서 비유읽기를 하면 좋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성서독자들은 본문 비유이야기에 숨겨진 예수의 절절한 육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비유에서 한 달란트 맡은 종과 관련한 사건과 행동 속에서 어떻게 비유의 숨겨진 은유를 찾아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서구교회가 본문비유를 읽고 해석해온 내용들을 정리하면 대체로 이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물로 주신 달란트(재능)을 크다 작다 불평하지 마라. 다만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해서 성공해라. 그러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크게 보상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이 벌이는 사건과 행동을 쫒아 본문비유를 읽다보면 이제껏 한국교회가 반복해온 이러한 해석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뜻풀이는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이야기의 실제 내용과도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런 해석은 서구제국주의교회들의 ‘메시아 종말론신앙 또는 그리스도 재림신앙’에 따른 알레고리 상상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서구기독교회의 자본주의 윤리지침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예수는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를 통해서 로마제국 금융경제시스템의 착취와 독점과 쌓음 그리고 자본권력욕망의 실체를 폭로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로마제국 맘몬․자본권력을 향한 대항행동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대안세상(alternative society)을 제안하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맡기는 돈의 크기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등’ 어마어마하다. 그러면서도 주인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실제로 로마제국의 유명한 철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유명한 정치가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도 북아프리카에 수많은 자산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노예대리인들에게 자산관리와 투자를 맡겨두고 로마에서 여유로운 활동을 했다.
또 한편 본문비유 이야기의 끝자리에서 돈놀이 하는 은행가가 등장한다. 따라서 본문비유의 내용과 상황으로 보아 본문비유이야기 속에서 주인은 예수시대의 대상인이거나 대자본가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에도 대상인 또는 대자본가들이 있었을까? 대다수의 성서학자들은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에 크고 작은 상인들과 자본가들이 있었다’고 이해한다. 실제로,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매우 중요한 식민지였던 이집트와 시리아를 잇는 가교지역이다. 그러기에, 로마제국 안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대상인 또는 대자본가들이 예루살렘에 자기사업장을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에는 대상인 ․ 대토지주 ․ 세금청부업자 ․ 은행가 등 로마제국의 큰 손 자본가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자기사업체의 국제 업무와 사회․정치이유로 로마제국 여러 식민지역들을 여행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사업장을 둔 대상인과 대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소유 자산들을 맡아서 관리해 줄 노예대리인들을 거느려야만 했다. 물론 여기서 노예 대리인들이란 전적으로 주인에게 하나하나 지시를 받는 종이라고 할 수 없다. 주인은 자기 종들의 사업능력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각자 능력에 따라 지분을 나누어 맡겼을 것이다.
실제로 본문비유는 ‘카타 텐 이디온 뒤나민 κατὰ τὴν ἰδίον δύναμιν 각 사람에게 제 능력에 따라’라는 문구를 통하여 이러한 상황을 증언한다. 이로써 대자본가들은 로마제국 금융시스템 속에서 유한책임투자제도의 특혜를 누렸다. 유한책임투자제도야말로 대자본가들이 노예대리인들을 선택하고 그들을 앞세워 무한투자에 나설 수 있는 밑바탕이다.
이렇듯이 본문비유에서 노예대리인들을 다루는 주인의 자본투자행태는 21세기 독점자본들의 자본투자행태와 판박이다.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독점자본들은 ‘무한경쟁과 차별대우’를 통하여 임금노예들의 잠재능력을 밑바닥까지 쥐어짠다.
이렇듯이 예수의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에서처럼 로마제국으로부터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 이르기까지 맘몬․자본권력은 무한착취와 독점과 쌓음을 추구해왔다. 그것은 언제나 쉽고 가능한 일이었다. 로마제국 금융시스템에서 대상인과 자본가들은 로마제국 권력과 야합하여 얼마든지 식민지주민들을 약탈하고 착취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에 빌붙어 사익을 추구하는 예루살렘 소규모 자본가들에게도 무한 사익창출이 ‘식은 죽 먹기’였다.
고대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성전에 바쳐질 희생동물들을 거래하는 일’은 대제사장 가문의 독점사업이었다. 또한 ‘성전세를 내기 위한 성전화폐 교환사업’도 그들의 독점사업이었다. 나아가 ‘유대식민지 주민들에게 걷어야 하는 인두세 청부업’도 예루살렘 자본가들의 독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종들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큰돈을 밑천삼아 장사(또는 투자사업)을 벌인다. 뿐만 아니라 두 종들이 저마다 1백%라는 엄청난 자본이익을 만들어 낸다. 이때 본문비유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은 종들의 삶의 행동양식을 표현하기 위해 활발하고 거침없는 3음보 동사문장을 사용한다.
“즉시,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① 포류테이스 πορευθείς 가서, 그것으로 ② 에르가사토 ἐργάσατο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③ 에케르데센 ἐκέρδησεν 벌었다.”
그렇다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은 종들은 평소에 주인을 가까이 따르며 주인의 사업 활동을 돕고 배웠을까? 아니면 로마제국 식민지 지중해세계에서 주인의 사업네트워크가 매우 튼튼하고 촘촘하며 독점이라서 종들의 돈벌이가 누워서 식은 죽 먹기였을까?
예수는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이야기에서 청중과 독자들에게 그러한 의문의 실체를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본문비유의 청중들과 독자들은 비유문맥 안에서 두 종들의 터무니없는 성공의 밑바탕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두 종의 자본주의 성공신화는 ‘로마제국 지배체제 안에 독점자본권력의 약탈횡포와 착취와 축적욕망의 거대기계구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두 종들의 어마어마한 자본주의 성공신화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시대 로마제국 금융시스템 속에서 생각한다면, 종들이 지중해 해상무역사업에 투자했을 수 있다. 또 세금징수 조합회사에 투자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로마제국 키케로는 세금징수사업(노예대리인이 투자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비위사실 때문에 정적에 의해 로마당국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비유 속 두 종들의 자본주의 성공신화는 맘몬․자본권력의 착취와 독점과 쌓음의 거대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에 끼인 노예인간군상의 표상이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의 프락시스
그러나 놀랍게도 본문비유가 드러내는 로마제국의 금융시스템과 시대상황 속에서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앞선 두 종과 전혀 다른 ‘삶의 행동양식’을 드러낸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대자본가인 주인이 여행을 떠난 후 자기에게 맡겨진 은화 한 달란트를 땅을 파고 묻어 버린다. 본문비유는 한 달란트 맡은 종의 이러한 삶의 행동양식을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어투의 3음보 동사문장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① 아펠톤 ἀπελθών 떠나와서, 땅을 ② 오뤼크센 ὤρυξεν 파고, 자기 주인의 은화를 ③ 에크뤼퓌센 ἔκρυψεν 묻었다.”
이때 본문은 ‘아페르코마이’라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하는데 ‘아포 ἀπό ~로부터 + 에르코마이 ἔρχομαι 떠나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이 여행을 떠나자마자 로마제국 금융시스템을 완전히 떠나서 주인의 돈을 땅을 파고 묻어버린다. 그럼으로써 아예 주인의 독점자본으로 하여금 착취와 독점과 쌓음의 가능성을 무력화시킨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의 이러한 반 불로소득, 반자본주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의 태도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주인이 ‘왜 자기 돈을 은행가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받게 하지 않았느냐’고 한 달란트 맡은 종을 비난하는 것에서 증명된다.
참으로 놀랍게도 한 달란트 맡은 종이 대자본가인 주인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을 향해 대항행동(對抗行動)에 나선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땅을 파고 달란트를 묻어버리는 행동양식은 철저한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반 지배체제 대항행동이다. 돈을 땅에 묻는 행위야말로 독점자본권력의 무한증식과 쌓음의 욕망을 폐기처분하는 가장 강력한 대항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리는 대항행동의 발단은 ‘모질고 탐욕스러운 대자본가인 주인의 부재’ 곧 주인의 여행이다. 주인은 먼 여행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에게 자신의 자산들을 나누어 맡긴다. 주인이 없는 동안에도 자산들이 묶이는 일없이 계속해서 이익을 내고 쌓음이 일어나도록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버림으로써 주인의 이러한 의도를 묵살해 버린다. 실제로 한 달란트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한 달란트는 로마화폐로 6천 데나리온인데 예수시대에 숙련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δηνάριιον)이었다. 한 노동자가 이십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 모아야 만져 볼 수 있는 금액이다.
따라서 한 달란트 맡은 종이 달란트를 땅에 묻어 버리는 대목에서 비유의 청중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청중들은 예수 비유이야기의 엄중함을 온몸으로 체험하듯 느꼈을 것이다. 무자비하고 탐욕스러운 주인이 그 큰돈을 종들에게 맡겨서 많은 이익을 만들어내도록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대자본가인 주인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을 짓뭉개버리는 삶의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이로써 예수의 비유이야기 청중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긴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어지는 비유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자.
대자본가인 주인의 불로소득대박 기쁨 안에서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함께 셈을 했다. 다섯 달란트 맡았던 종이 나아와서 다섯 달란트를 더 내어놓고 말했다.
“주인님, 저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제가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여기서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여행을 끝내고 나타나는 주인의 상황은 종종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상징화되기 일쑤다. 실제로 마태복음저자는 ‘열 처녀 비유와 최후의 심판비유’사이에 본문비유를 의도적으로 끼워 넣었다. 그럼으로써 언제일지 모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깨어서 신실하게 일하라’는 기독교자본주의 윤리화를 시도한다.
이렇듯이 본문비유에 나타나는 저자의 그리스도 재림신앙 알레고리 관점은 ‘주인이 돌아와서 셈 한다’라는 비유이야기 흐름 속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실제로 본문비유 속에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종들의 사업보고를 들은 후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종들을 칭찬한다.
“잘했다. 착하고 믿음직한 종아! 네가 작은 것들에 믿음직했으니, 내가 더 많은 것들 위에 너를 세우겠다.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
대자본가인 주인이 ‘맘몬․자본권력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에 끼인 노예인간들을 평가하는 잣대’는 오롯이 맘몬․자본권력을 향한 숭배와 충성경쟁 뿐이다.
네가 작은 것들에 믿음직했으니 -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가 작은 것들이라면 주인은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원하는 걸까?
내가 더 많은 것들 위에 너를 세우겠다 - 주인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에는 만족이라는 끝이 있을까?
네 주인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 - 맘몬․자본권력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에 끼인 노예인간들은 속절없이 대자본가인 주인의 초청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로마제국 금융시스템에서 노예 대리인들은 높은 투자실절을 통해서 해방노예가 되는 꿈을 꿀 수 있다. 일부 해방노예들은 로마제국 금융시스템 속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부를 쌓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노예주인들의 바람은 결코 아니다. 대자본가인 주인의 불로소득대박 기쁨 안에서 노예대리인에게 주어지는 기쁨은 별로 없다. 도리어 대자본가인 주인은 자신에게 불로소득대박을 선물한 종들의 자본투자능력을 그 밑바닥까지 쥐어짜려고 한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종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내가 더 많은 것들 위에 너를 세우겠다.”
대자본가인 주인의 독점과 쌓음을 위한 욕망의 프락시스
그러나 예수의 비유 이야기에서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맡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리는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삶의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이렇듯이 한 달란트 맡은 종의 대항행동은 주인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과 타협할 수 없는 갈등을 일으킨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가 나타내는 주인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과 의지를 전혀 헤아리거나 고려하지 않는다. 도리어 주인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을 폐기처분하는 과격한 대항행동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땅을 파고 묻어버린다.
도대체 한 달란트 맡은 종의 이러한 삶의 행동양식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어지는 예수의 비유이야기를 읽어 보자.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나아와서 말했다.
“주인님, 나는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모진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은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 추수하는 사람이고
키질도 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알곡을 모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하면서 떠나와 땅에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것을 차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비유이야기의 흐름은 이야기 줄거리들과 함께 ‘한 달란트 맡은 종과 대자본가인 주인이 셈하는 장면’을 드러내놓고 까발린다. 앞서서 본문비유는 멀리 여행을 떠나는 대자본가인 주인이 자기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는 상황을 이야기 했다. 또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종들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대조되는 삶의 행동양식을 보고했다. 이어서 주인과 다섯 또는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의 셈하는 내용들과 보상을 이야기했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은 대자본가인 주인과 한 달란트 받은 종사이의 ‘셈’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들러리 사건들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 달란트 맡은 종이 알아차린 대자본가인 주인의 삶의 실체는 무엇일까? 예수의 비유이야기에서 대자본가인 주인의 숨겨진 삶의 실체는 ‘모진 사람’이다. 이때 본문이 사용하는 헬라어 낱말이 ‘스클레로스 σκληρός’이다. 차마 사람이 못할 짓을 얼마든지 하고야 마는 ‘독한심성을 가진 사람’이다. 본문비유는 모진 사람으로서 대자본가인 주인의 삶의 프락시스(행동양식)를 ‘이렇게’ 표현한다.
“당신은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 ‘추수하는 사람’이고 키질도 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알곡을 모으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비유이야기 속 한 달란트 맡은 종의 입말을 빌어서 대자본가인 주인을 향해 사납고 거친 비판을 쏟아낸다. 로마제국 금융시스템을 통한 대자본가들과 대상인들의 약탈횡포와 착취와 축적욕망의 실체를 향해 매섭고 날카로운 평가를 쏟아놓는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한 달란트 맡은 종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대항행동의지와 뜻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으로 새겨서 받아들인다.
그런데 본문비유에서 대자본가인 주인은 ‘한 달란트 맡은 종이 자신을 향해 쏟아내는 날카롭고 거친 평가와 비판’을 전혀 변명하지 않는다. 도리어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을 향해 ‘이렇게’ 호통을 친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 추수하고 키질도 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알곡을 모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더란 말이냐?”
이때 본문은 ‘에데이스 ᾔδες 너는 이미 알고 있었더란 말이냐’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이 헬라어 동사는 ‘에이돈 εἶδον 보다 + 오이다 οἶδα 알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이 맘몬․자본권력의 속성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주인은 더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그렇다면 내 돈을 은행가(또는 고리대금업자)에게라도 맡겼어야지, 그랬다면 내가 이자라도 챙기지 않았겠느냐, 이 종놈아’라고 욕설을 퍼붓는다.
이때 본문비유가 사용하는 ‘트라페지테스 τραπεζίτης’라는 헬라어 낱말은 ‘테트라스 τετράς 넷 + 페자 πέζα 발’로 이루어진 합성어다. 문자의미는 ‘네발탁자’라는 뜻인데 은행의 계산대를 상징하는 말이다.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는 고리대금업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 여기서, 대자본가인 주인의 입말에 오른 ‘은행가 또는 고리대금업자’는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법규를 위반하는 금기어다. 유대인들은 옛 희년신앙 전통에 따라 이자를 ‘사회경제 공동체 죄악’으로 규정하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철저하게 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종교․사회․경제 공동체에서는 고리대금업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비유이야기에서 대놓고 ‘은행가 또는 고리대금업자’를 이야기 한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본문비유를 통해서 유대종교․사회․경제 공동체 안에 만연한 반 희년신앙, 반 희년행동 타락을 폭로하고 고발한다. 예루살렘성전에 자리 잡고 앉아서 풀뿌리 사람들을 착취하는 성전화폐 고리대금업을 날카롭고 거센 어조로 비난한다. 나아가 로마제국 금융시스템 속 맘몬․자본권력에 기생하며 풀뿌리 사람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체제의 타락을 경고한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의 대항행동 양식, 자본주의 바깥으로 여행하라.
이제 예수의 비유이야기의 끝에서 대자본가인 주인이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내리는 처벌내용을 읽어 보자.
“그러니 너희는 그자로부터 한 달란트를 빼앗아라. 그래서 너희는 그것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아라테 ἄρατε 너희는 빼앗아라, 도테 δότε 너희는 주어라” 우리말 성서는 이 문장에서 ‘너희는’이라는 주어를 빼고 번역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너희는’이라는 주어를 살려서 번역하면 예수의 비유이야기 안에 숨겨진 청중과 비유를 듣고 있는 청중사이에서 혼돈과 겹침의 모순이 발생한다. 따라서 ‘너희는 그 자로부터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그것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라는 외침은 비유이야기꾼 예수의 말장난이다.
그러나 한편 예수의 이 외침은 비유이야기 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숨겨진 청중과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예루살렘 청중과 21세기 비유의 독자들을 향한 예수의 선동언어이기도 하다.
그러할 때, 예수의 비유이야기 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숨겨진 청중은 누구일까?
예수의 비유이야기 속에서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21세기 예수의 비유독자들은 ‘비유이야기 속에 숨겨진 무수한 청중들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의 비유를 읽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무수한 독자들’이 예수의 비유이야기 속 숨겨진 청중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비유에서 듣게 되는 예수의 이 외침은 예루살렘 청중들과 예수비유의 무수한 독자들을 향한 선정선동이다. 시대의 대자본가의 독점자본을 맡은 노예대리인으로서 살아가는 시대의 풀뿌리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게릴라식 선전선동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에게 무엇을 선동할까? 그것은 바로 맘몬․자본권력의 약탈횡포와 독점과 쌓음의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 노예인생에서 탈출하라는 선동이다. 이제 끝판에 이르러 맘몬․자본권력이 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에게 맡긴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서 다른 노예 대리인들에게 맡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로마제국 금융시스템에서 노예 대리인에게는 대자본가들의 투자불로소득으로부터 아무런 몫도 없다. 노예대리인은 맘몬․자본권력의 독점과 쌓음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에 끼인 노예군상 일뿐이다. 로마제국 금융시스템 속에서는 노예대리인에게 ‘아무것도 보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노예대리인의 투자유한책임을 제도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는 다섯 달란트 또는 두 달란트 맡은 종들이 주인의 기쁨에 참여해서 얻은 허망한 보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잘했다. 착한 종아, 내가 너에게 더 큰 자본을 맡기겠다. 더 많은 불로소득을 만들어 내거라.”
그러므로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이야기 속에 숨겨진 신앙은유의 실체는 대자본가인 주인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을 향한 대항행동이다. 예수는 한 달란트 맡은 종의 삶의 행동양식을 통하여 비유청중과 독자들에게 반제국주의 지배체제 게릴라 대항행동을 선동한다. 비유의 숨겨진 청중으로서 독자들에게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대항행동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실천행동양식이라고 선언한다.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유언비어 게릴라 대항행동양식이라고 선포한다. 예수는 한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한 비유 속 주인의 혹독한 앙갚음의 처벌언어를 맘몬․자본권력을 향한 유언비어 게릴라 대항행동양식으로 바꾸어 비유청중들과 독자들을 선동한다.
“너희는 한 달란트 맡은 종으로부터 한 달란트를 빼앗아라. 그래서 너희는 그것을 열 달란트 맡은 종에게 더 보태주어라.”
맘몬․자본권력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에 끼인 노예 대리인들이여, 이제 잘 듣고 자세히 보았는가?
이제 끝판에 왔다. 맘몬․자본권력은 너희 노예대리인들에게 맡긴 모든 것들을 빼앗을 것이다. 너희는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에 종속된 노예대리인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금 맘몬․자본권력의 약탈횡포와 착취와 쌓음의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 노예 대리인으로부터 탈출하라. 맘몬․자본권력의 약탈과 독점 그리고 쌓음의 욕망에 대항하라. 맘몬․자본권력으로부터 맡겨진 한 달란트를 땅을 파고 묻어버려라. 그럼으로써 휘황찬란한 자본주의 바깥, 그 어둠속으로 쫓겨나라.
예수시대의 부익부 빈익빈을 개탄하는 풀뿌리 사람들의 유언비어
휘황찬란한 자본권력의 바깥 ,그 어둠속으로 쫓겨나라.
예수의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이야기는 대자본가 주인의 혹독한 앙갚음의 처벌언어로 끝났어야 한다. 그런데 마태복음 저자이거나 또는 후대 편집자 누군가에 의해 본문읽기2. 29절과 30절의 내용들이 본문비유에 덧 붙여졌다. 이렇게 덧붙여진 29절은 서구교회에 의해 ‘영적인 풍요의 전형으로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보상의 전형적인 양태로’ 해석의 오류를 낳고 있다.
그러나 본문비유에 덧붙여진 29절은 ‘예수시대의 부익부 빈익빈을 개탄하는 풀뿌리사람들의 유언비어’일 뿐이다. 맘몬․자본권력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에 끼인 노예대리인들의 고통과 절망의 탄식일 뿐이다. 실제로 신약성서에는 이처럼 풀뿌리 사람들의 유언비어를 선전선동구호로 사용한 본문들이 많다.(마가복음 4:25, 마태복음 13:12, 누가복음 8:18) 이와 관련하여 본문읽기2.에서는 맘몬․자본권력의 약탈횡포와 착취와 쌓음과 독점욕망을 드러내는 3음보 동사 문장을 사용한다.
“누구든지 ① 엨콘티 ἔχοντι 가진 자에게는, ② 도테세타이 δοθήσεται 더 많이 주어져서, ③ 페리슈테세타이 περισευθήσεται 넘쳐나게 될 것이다.”
이어서 본문읽기2.는 맘몬․자본권력의 독점과 쌓음의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에 끼인 노예 대리인들의 참혹한 고통과 절망을 드러내는 3음보 동사 문장을 사용한다.
“① 메 엨콘토스 μή ἔχοντος 가지지 못한 사람’은, ② 호 엨케이 ὅ ἔχει 그가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③ 아르테세타이 ἀρθήσεται 그 자신으로부터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제 끝으로 본문읽기2. 30절 내용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쓸모없는 종’을 더 바깥 어둠 속으로 내어 쫓아라. 거기서 울며 이를 악묾이 있을 것이다.”
참으로 그렇다. 맘몬․자본권력은 ‘한 달란트 맡은 종의 행동양식을 처벌’하기 위해 독점과 쌓음의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에 끼인 노예대리인들에게 본문읽기2.의 내용들을 선동해왔다. 그러므로 이제 필자는 본문읽기2. 마지막 문장을 읽고 해석하면서 21세기 한 달란트 맡은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전선동 한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의 삶의 행동양식을 따르시오. 맘몬․자본권력의 약탈횡포와 착취와 쌓음의 욕망을 망을 무력화 하시오. 그럼으로써 휘황찬란한 자본권력의 바깥 그 어둠속으로 쫓겨나시오.”
21세기 한국교회의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 읽기와 해석을 위한 제언
이천년 기독교회역사 속에서 교회들은 본문비유를 읽고 해석하면서 맘몬․자본권력 독점과 쌓음의 욕망기계구조 톱니바퀴에 끼인 노예대리인으로써 인생을 축복해왔다. 참으로 처참하게도 맘몬․자본권력 독점과 쌓음의 욕망을 향한 대항행동으로써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신앙진실을 숨기고 훼손하며 짓밟아왔다.
그러면서 도리어 맘몬․자본권력의 무한증식과 축적욕망을 우러러 떠받드는 가운데 자본주의 노예윤리를 두둔하고 편드는 해석을 바꾸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마태복음저자는 자신의 신학사상과 로마제국의 맘몬․자본세상 윤리에 맞추어 본문비유의 내용을 크게 손질했다. 그로 인해 예수가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려고 했던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신앙은유를 쫓는 일이 매우 어려워졌다.
따라서 초대교회에 이어 제국주의 서구교회 역시 본문비유를 ‘종말에 대한 경고로써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알레고리 해석으로 얼버무렸다. 또 한편 본문비유의 문맥을 비틀어서 기독교윤리 관념과 상징으로 연계했다. 그럼으로써 본문비유를 맘몬자본주의 세상에서 기독교사회경제 윤리로 오독(誤讀)해왔다.
이천년 서구교회는 본문비유를 읽고 해석하면서 교우들에게 ‘세상의 종말 때까지의 남은 시간을 정직하고 충성스럽게 살라’고 요청한다. 이렇듯이 서구교회의 본문비유해석을 이어 받은 한국교회들도 우리시대의 예수 신앙인들에게 ‘지금 당장 다섯 달란트 또는 두 달란트 맡은 종들의 자본주의 실천행동을 본받으라’고 떠들어 댄다.
그러나 이제.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맘몬․자본권력의 약탈횡포와 착취와 쌓음의 욕망을 우러러 받드는 자본주의 윤리행동 해석을 끝내야 한다. 서구교회의 본문비유 해석 퇴행을 걷어치워야만 할 때다. 그럼으로써 21세기 비유독자들은 한 달란트 맡은 종 비유를 통해서 ‘예수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철저하게 질문해야 한다. 그러할 때 본문비유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예수의 육성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삶의 행동양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삶의 행동양식을 쫓아서 네가 맡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라. 그래서 지구촌 제국주의 맘몬․자본권력의 약탈횡포와 착취와 축적욕망의 숨통을 끊어라.”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서 가장 정당한 삶의 행동양식이다. 나아가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잇는 신앙결단이며 신앙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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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신앙』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유 14. 큰잔치 비유,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무지렁이들의 큰잔치 (0) | 2024.08.12 |
『희년신앙』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유 12. 용서하지 못하는 종 비유, 로마제국 피라미드 빨대착취 거대기계구조의 파멸을 기다리며 (0) | 2024.08.11 |
『희년신앙』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유 11. 맘몬․자본세상에서 장물아비 인생을 살다. (0) | 2024.08.10 |
『희년신앙』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10. 예수의 십자가 행동, 이천년 예수십자가 신앙결사를 이끌다. (0) | 2024.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