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커먼즈, 하나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누가복음 17:20-21
본문읽기
예수가 바리새파 사람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오겠느냐’ 캐물음을 당한 후에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몰래 숨어서 엿보는 가운데 오지 않는다. 그들이 ‘보라 여기다 혹은 저기다’라고 선동할 수 없다. 보라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21세기 지구촌 사회경제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열쇠말은 무엇’일까?
오늘 예배에는 세 교회가 함께하는 연합예배다. 나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본문말씀 풀이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다. 무엇보다도 함께 예배하는 세대와 연령층이 다양해서 더 좋다. 물론, 나는 20세기에 태어나 인생경험을 쌓고 장년에 이르러 21세기를 시작했다. 지금 나는 노년의 삶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20세기 경험이 전혀 없는 청년들도 많다. 오늘 본문말씀풀이가 귀에 들어올까, 걱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한다. 지금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21세기 지구촌 사회경제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열쇠말은 무엇’일까? 아마도 여기 젊은 청년들이나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촌 기후위기’를 첫손에 꼽을 것이다. 또 나이든 사람으로서 지금의 한반도 분단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미국․중국 제국주의 패권경쟁위기’를 이야기 할 것이다.
‘21세기 지구촌 신자유주의 + 금융화’(financiali-zation)
나는 ‘지구촌 기후위기와 미국․중국 제국주의 패권경쟁 위기’의 밑바탕으로써 ‘지구촌 신자유주의 + 금융화’(financiali-zation)를 꼽는다. 더해서 디지털․스마트폰시대의 개인주의화를 이야기하고 싶다.
실례로 대한민국사회는 20세기 중반부터 산업화시대를 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고향 땅을 떠났다. 20세기말에 이르러는 ‘신자유주의’광풍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모든 사회․경제 공동체관계로부터 고립시켰다. 스스로 개인주의․고립주의의 게토 속에 갇히면서도 전혀 무감각하다. 아마도 디지털․스마트폰시대의 특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디지털․스마트폰시대에는 마치 실제로 지구촌이 내 손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21세기 지구촌 사회경제 상황에서 큰 변화는 ‘금융화’이다. 21세기 지구촌 금융화는 사람들의 ‘사회경제 자기 정체성’을 분열시켰다. 21세기 지구촌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유사자본가이다. 나아가 21세기 플랫폼 자본주의 상황에서라면 스스로 자본으로부터 부림을 당하는 노동자이만 동시에 개인사업자 지위를 갖는다.
이렇듯이 21세기에는, 금융이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모든 쓰임과 필요를 금융에 의지하거나 또는 관리하도록’내맡긴다. 한마디로 ‘일상생활의 금융화’(financialization of daily life)이다.
이와 관련하여 금융(finance)란, 라틴어 finis 끝 + 프랑스어 명사어미 ance 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한마디로 금융이란, ‘몸값(또는 빚)을 갚고 채무노예상황을 끝내다’라는 의미다. 따라서 21세기를 살며 경제활동을 모든 사람들은 ‘일상생활의 금융화’에 매여 살 수밖에 없다. 하루하루 자기에게 매겨진 몸값을 치르고 채무노예 삶을 끝내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면서 속절없이 21세기 일상생활의 금융화 굴레를 쓰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이 굴레를 벗어나려면 21세기 금융화에 따른 불로소득 자본주의 은총을 입어야한다. 그런데 그 은총을 입을 확률은 단 1%, 아니 0.1% 정도에 불과하다.
이렇듯이 21세기 극단적 개인주의 시대상황에서 수많은 임금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착취한다. 21세기 지구촌 신자유주의․금융화굴레 속에서 자기 몸값상승을 위해 자기 온몸을 갈아 넣는다.
미국의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Michael Hudson 문명의 운명)은 ‘21세기 신자유주의․금융화야말로 중세유럽의 고리대금업과 약탈경제로의 회귀’라고 설명한다. 영국 지리학자 브렛 크리스토퍼스도 ‘21세기지구촌은 불로소득 자본주주의(Rentier Capitalism)체제에 완전히 종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쟁의 금융화
무엇보다도 21세기 지구촌의 비극은 전쟁의 금융화로 인한 초과소비다. 실제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의 하루전비 하루 2억7천만 달러이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군의 1년 국방비 총액은 234억 달러에 불과하다. 팔레스타인 평화운동가 니달 아부줄루프(Nidal AbuZuluf)는 ‘이스라엘 정부가 21세기 금융시스템을 통해서 천문학적 전쟁비용 채권을 발행 한다’고 증언한다.
21세기 지구촌 제국 미국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비용으로 수백억 달러를 이스라엘에 지원했다. 또 2023년 말 현재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비용으로 1,100억 달러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덩달아서 K방산 주가 활황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K방산이 차지하는 지구촌 무기시장 점유율은 2.8%에 불과하다. 미국의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가 지구촌 무기시장을 독점한다. 이어서 러시아의 몫이 쪼끔이고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로국가들의 몫은 찔끔 이다.
이렇듯이 21세기 전쟁의 금융화로 인해 지구촌 제국주의와 미국월가 등 금융업과 군산복합체로 이루어진 ‘지구촌 불로소득 금융과두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제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삶의 마당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시즌Ⅱ’를 행동해야 한다.
본문말씀을 다시 자세히 읽어보자.
예수가 바리새파 사람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오겠느냐’ 캐물음을 당한 후에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몰래 숨어서 엿보는 가운데 오지 않는다. 그들이 ‘보라 여기다 혹은 저기다’라고 선동할 수 없다. 보라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누가복음 본문의 상황을 살펴보자. 예수는 지금 제자들과 따름이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예루살렘이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유대교 기득권엘리트계층인 바리새파사람들이 달려들어 예수와 함께 하나님나라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본문은 ‘에페로테테이스 Ἐπερωτηθεὶς 캐물음을 당한 후에’라는 과거수동태분사를 사용한다. 이 분사의 원형동사는 ‘에페로타오 ἐπερωτάω 인데 에피 ἐπί 가까이로 와서 + 에로타오 ἐρωτάω 따지고 캐묻다’라는 의미다. 바리새파사람들은 왜 예수와 이런 거친 논쟁을 벌여야 했을까?
유대교의 여호와의 날이란 무엇일까?
여기서 본문이 언급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교의 오랜 전통인 심판과 징벌로써 여호와의 날(또는 하나님의 날)이다.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렇다면 유대교의 여호와의 날이란 무엇일까? 맨 처음 여호와의 날은, 옛 히브리들의 출애굽 해방과 구원사건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파라오 노예제국에서 억압당하는 히브리노예들의 상황에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해방하셨다. 이날에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는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과 징벌을 받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여호와의 날은, 야훼 하나님의 율법(또는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배신한 권력자와 지배체제가 심판과 징벌을 받는 날로 변했다. 아모스와 이사야 등 예언자들은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왕과 권력자 등 지배체제의 심판과 징벌을 예언했다.
더 많은 세월이 흘러서 북이스라엘왕국과 남유다왕국이 망한 후에 여호와의 날은 야훼 하나님의 율법(또는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법규)을 배신한 풀뿌리 사람들(또는 백성들)에 대한 심판과 징벌의 날로 변했다. 요엘과 스바냐 등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야훼 하나님의 율법을 배신한 풀뿌리 사람들을 향한 심판과 징벌을 예언했다. 히브리 성서의 수많은 예언자들 가운데 심판과 징벌로써 하나님의 날을 거부한 예언자는 호세아뿐이다. 호세아는 오롯이 야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선언하고 예언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시대에 이르러 율법사와 바리새파 등은 야훼 하나님의 율법을 배신한 풀뿌리 사람들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유대 사회․종교․정치․경제 공동체에서 쫓아냈다. 오롯이 유대사회 공동체를 깨끗하고 의로운 자들로만 채워서 심판과 징벌로써 야훼의 날에 대비하려고 했다.
심판과 징벌로써 하나님의 날에 대한 두 가지 대응수단
한편 예수시대의 유대교 안에는 심판과 징벌로써 하나님의 날에 대한 두 가지 대응수단이 있었다. 하나는 제사장 등 사두개파가 주도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 종교였다. 누구라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지었다면 얼른 예루살렘성전으로 달려와 지은 죄에 상응하는 희생제물을 바쳐야만 했다. 예루살렘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침으로써 죄 씻음 받은 후에야 깨끗하고 의로운 유대사회․종교 공동체 일원으로 자격을 얻었다.
이에 반해 홀연히 유대광야에 나타난 세례요한은 회개와 죄용서의 물세례를 베풀었다. 회개와 죄용서의 물세례를 통해 가난하고 힘없는 그 땅 풀뿌리 사람들도 깨끗함을 얻게 되었다. 요한은 유대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열화와 같은 칭송을 얻었으나 예루살렘 사회종교 기득권 엘리트계층의 미움을 샀다.
또 하나 율법사․서기관 등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을 철저하게 구별하고 차별하는 담쌓기를 통하여 심판과 징벌로써 하나님의 날에 대응했다. 그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의인(義人)론 - 깨끗하고 죄 없는 의인들은 보상을 받고 죄인들은 심판과 징벌에 처해져 멸망당한다’는 종교이데올로기를 세뇌시켰다. 바리새파는 613개 생활율법을 만들어 그 풀뿌리 사람들의 삶을 철저하게 옭아매고 감시했다. 그러면서 사회․종교․정치․경제 사익을 추구했다.
‘시기와 징조’는 모든 종말론의 가장 핵심 이슈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이 심판과 징벌로써 하나님의 날은 ‘어느 때에, 어떻게 임하는가’라는 종교적 조바심과 궁금증을 일으킨다. 한마디로 유대교 종교기득권 엘리트들에게는 하나님의 날의 시기와 징조를 아는 것이 매우 급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시기와 징조’는 모든 종말론의 가장 핵심 이슈일 수밖에 없다. ‘어느 때에 어떻게’ 하나님의 날이 임하는가를 아는 방법이 시기와 징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형의 종말론들이 시기와 징조를 이슈화함으로써 그 종말론의 실체를 강화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바울은 유대인으로써 메시아 종말론 사상의 실체를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이슈화 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예수시대 유대인 사이에서는 다윗의 후손 정치메시아 대망(待望)론 널리 퍼져있었다. 언제든 때가 이르면 다윗의 후손 정치메시아가 등장할 것이고 모두 힘을 모아 메시아의 나라를 성취하면 될 것이었다. 실제로 고대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에서는 수많은 메시아(또는 예슈아)들이 명멸했다. 물론 일부 성공사례도 있었다. 예수 이전세대의 바리새파가 주도가 마카비왕조다. 마카비왕조의 역사는 천주교 구약성서에서 경전으로 채택되었다.
두 번째, 예수시대의 소수 에세네파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은 묵시문학의 우주메시아 종말론을 주장했다. 이 묵시문학을 ‘아포칼륖시스 ἀποκάλυψις’ 표현하는데 ‘덮개를 벗김’이라는 뜻이다. 오래전부터 숨겨지고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날은 언제가 때가 되면 그 덮개가 벗고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렇듯이 성서바깥에는 수많은 묵시문학작품들이 알려져 있다. 성서 안에 들어온 첫 번째 묵시문학 작품은 기원전 2세기 헬라제국 셀류쿠스왕조 박해시대에 쓰여 진 다니엘서이다. 두 번째 작품은 서기 81-96년 로마제국 도미티아누스 황제박해시대에 쓰여 진 요한계시록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지금 여기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지금 여기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함께 건설하며 누리는 나라다. 그러므로 심판과 징벌로써 유대교의 하나님의 날과 전혀 다르다.
물론 예수는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다윗의 후손 정치적 메시아 대망(待望)론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예수는 자신 붙잡아 십자가에 처형하려는 자들 앞에서 칼을 빼어든 제자 베드로에게 명령한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넣어라”
그리고 이렇게 일갈한다. “참으로 칼을 쓰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성서학자들은 ‘베드로가 다윗의 후손 정치메시아를 대망하던 열심당원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하늘에서 내리는 불꽃쇼를 통해서 의인들(또는 선민유대인들)만을 구원하는 우주메시아 종말론을 거부한다.
그래서 예수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몰래 숨어서 엿보는 가운데 오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이때 본문은 ‘파라테레세오스 παρατηρήσεως’라는 헬라어 낱말을 사용한다. 이 낱말은 ‘파라테레오 παρατηρέω’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파라 παρά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가서 + 테레오 τηρέω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나라는 이제나 저제나 마음 졸이며 시기와 징조를 엿보는 가운데 오지 않는다. 깨끗하고 의로운 소수 유대선민들만을 구원하는 묵시문학 우주메시아 종말론이 아니다.
또 예수는 본문에서 ‘그들이 보라, 여기다 혹은 저기다’라고 선동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이때 본문은 ‘호데 에 에케이 ὧδε ἤ Ἐκεῖ’라는 헬라어 문구를 사용한다. 마치 ‘호데 - 요기요 요기 또는 에케이 - 저기요 저기’라고 호객행위를 묘사하듯 표현한다. 나아가 그들이 하나님나라를 요기요 혹은 저기요라고 ‘우데 에루신 οὐδὲ ἐροῦσιν 선동할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이때 본문이 사용한 헬라어 동사 ‘에레오 ἐρέω’는 단순히 ‘말하다’라는 의미 보다 ‘서로 부르다, 대화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주어인 그들이란 누구일까? 스스로를 위대한 다윗시대를 잇는 종말론 정치메시아라고 깃발을 내건 유대종교․정치 야심가들이다. 실제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폭압과 착취 속에서 숨죽여 때를 기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은 종말론 정치메시아 선동에 휘말려 기꺼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와 관련하여 21세기 우리시대 상황에서 말하면 그들이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외쳐온 윤석열일까?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라며 지구촌 제국주의 깃발을 휘두르는 트럼프일까?
보라,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이제 끝으로 예수는 본문의 온갖 옥신각신하던 상황들을 한마디로 정리하여 ‘이렇게’ 선언한다.
“보라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이 선언이야말로 예수의 참말이며 예수신앙의 진실이라고 믿는다. 21세기 모든 예수신앙인들의 신앙 삶과 신앙행동 길라잡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마디로 본문의 이 선언이야말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핵심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엔토스 휘몬 ἐντὸς ὑμῶν’이라는 문구를 사용하는데 ‘너희 가운데’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약성서는 ‘엔 ἐν’이라는 전치사를 주로 사용한다. 엔은 ‘~안에’라는 뜻 외에 위치로써 ~위에 앞에 곁에, 시간으로써 ~하는 동안에, 수단으로써 ~로 말미암아, 원인으로써 ~ 때문에, 함께 라는 의미에서 ~에게 등 다양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용된 ‘엔토스 ἐντὸς 는 오롯이 ~가운데, 사이에, 안에’라는 뜻으로만 사용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너희 가운데’라는 의미는 ‘시간 + 공간 + 관계’ 등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참으로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예수신앙인들의 모든 신앙행동과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함께 이루어지고 함께 누린다. 그런 가운데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점점 더 커지고 깊어지고 널리널리 퍼진다.
이렇듯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마음 졸이며 몰래 숨어서 온갖 억측을 내어놓고 서로 따지며 헤아리지 않는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유대인들의 심판과 징벌의 하나님의 날에 대한 시기와 징조 따위가 아니다. ‘여기요 여기 또는 저기요 저기’라고 떠들어 대며 호객해야 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다.
불로소득 자본주의 시대에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 다시, 21세기 지구촌 신자유주의 ․ 금융화시대 또는 불로소득 자본주의 시대에 참으로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두 가지 신앙행동을 제안한다. 먼저, 21세기 불로소득 자본주의 시대상황에서 다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잇자’라는 제안이다. 나는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를 쫓아 희년빚탕감상담을 해왔다. IMF 외환위기 이후 20여 년 동안 감담 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자살대열로 내몰리는 이들의 빚문제 해결을 위해 개인파산면책 또는 개인회생을 상담했다.
옛 히브리들이 야훼하나님과 함께 맺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첫 번째는 빚 탕감과 채무노예해방이다.(출애굽기 21장, 신명기 15장, 레위기 25장) 어떤 히브리 사람이 다른 히브리를 노예로 삼는다면 반드시 육년 동안만 종으로 부려야 한다. 육년이 지나 칠년 째에는 아무런 몸값도 없이 해방되어 나가야 한다. 또한 외국사람에게 노예로 팔려간 형제자매들을 몸값을 주고 물러서 해방시켜야 한다.
• 두 번째는 이자금지와 서로의존경제(또는 사회적 경제) 그리고 사회경제 약자보호다.(출22장, 레25장)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괴롭히지 마라 → 결코 그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지마라.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에게 채권자처럼 굴지마라 → 결코 그들에게 이자의 짐을 지우지 마라. 네 생활경제 그늘 안으로 들어와 주저앉은 형제자매의 쳐진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어라 → 너는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너는 가난한 이웃들로부터 이자를 얻으려고 돈을 꾸어주어서는 안 된다. 너는 이윤을 얻으려고 양식을 꾸어주어서는 안 된다.
• 세 번째는 정의로운 재판과 사회경제공동체 규약이다.(출애굽기 23장) 거짓증인을 내세워 죄 없는 사람을 해코지 하면 안 된다. 사회경제 공동체규약을 만들고 서로 원수가 된 사람에게도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 나그네를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
• 네 번째는 쉼이 있는 노동세상 ↔ 안식일 및 안식년제도이다.(출애굽기 20장, 23장) 안식일에는 네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그리고 가축들까지 푹 쉬어야한다. 안식년에 이르러는 그 땅도 푹 쉬어야 한다. 안식년에 저절로 자란 그 땅의 생산물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 나아가 들짐승들도 함께 먹어야 한다.
• 다섯 번째는 토지공공성(또는 토지공개념제도)이다.(레위기 25장) 땅은 하나님의 것, 누구라도 아주 팔아넘길 수 없다. 만약 누군가 토지의 이용권 또는 수익권을 팔았다면, 산 사람은 언제든 땅 무르기를 허락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희년에 이르러 모든 땅들이 처음 주인에게로 되돌려져야 한다.
단비 커먼즈
두 번째 나는 단비 커먼즈을 제안한다. 그동안 우리사회의 커먼즈운동 경험들을 나름대로 정리하면 세 가지내용으로 모아서 설명할 수 있다. ① 커먼즈는 ‘공유자원’만이 아니다.(우버/에어비앤비 등) ② 커먼즈는 ‘사람들이 함께 공유자원을 관리하고 활동(노동)하며 관계 맺는 모든 것’이다. ③ 커먼즈는 사유화포기․민주주의․원시공산사회 등 세 가지 원칙을 갖는다.
실제로 커먼즈운동의 첫 번째 원칙은 사유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법적인 사유재산권 또는 개인소유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소유하지 않고 여럿이 함께 필요와 쓰임에 따라 사용하고 누리는 삶의 경험들을 쌓아야 한다. ․
두 번째 원칙은 온전한 민주주의다. 의사결정과정의 절차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소외된 사람을 배려하고 그들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
세 번째 원칙은 원시 공산사회다. 돈으로 표현되지 않는 다양하고 새로운 모든 형태의 활동과 노동을 존중해야 한다. 서로 서로의 능력에 따라 활동(또는 노동)하고 쓰임과 필요에 따라 나누어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소수 젊은이들은 도시형 커먼즈 실험과 모험을 통하여 다양한 경험을 쌓아 왔다. 주거, 소액대출, 국유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회경제 커먼즈 등. 그러나 21세기 신자유주의 ․ 금융화시대 나아가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도시형 커먼즈들은 지속가능성(높은 지대비용 등)의 한계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는 단비 커먼즈의 지속가능성 100%를 위하여 아래 내용들을 제안한다.
• 단비 커먼즈에서 터 잡고 함께 사는 사람들 : 출자금제도를 통한 사유화 포기 + 민주주의 원칙 + 원시 공산사회 원칙
• 단비 커먼즈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 출자금제도를 통한 사유화 포기 + 민주주의+ 원시 공산사회 원칙
• 단비 커먼즈에서 노후생활을 준비하는 사람들 : 출자금제도를 통한 사유화 포기 + 민주주의 원칙 + 원시 공산사회 원칙 + 십시일반(十匙一飯)
• 단비 커먼즈를 방문하는 사람들 : 자유로운 방문(서로를 위한 배려) +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의 활동과 노동 + 십시일반
• 단비 커먼즈를 이용하는 사람들 : 자유로운 이용(서로를 위한 배려) +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의 활동과 노동 + 문화․예술 활동 + 실비부담 + 십시일반
이제 나는 단비 커먼즈의 분야와 활동들을 아래와 같이 제안한다.
• 생명생태농업 커먼즈 : 농업법인 다함원이 주관한다. 생명생태농업에 관심 있는 참여자들은 농업법인 다함원 출자로 참여할 수 있다. 누구라도 농업법인 다함원 영농일지에 따르는 울력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소외됨 없이 생명생태농업의 하늘 뜻과 은총을 함께 누릴 수 있다. 농업법인 다함원 출자로 참여한 사람들에는 생명생태농업 생산물 노느매기(유기농 쌀 나눔 + 김장 나눔)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 돌봄 커먼즈 : 도란도란 사회적협동조합이 주관한다. 돌봄 커먼즈에 관심 있는 참여자들은 도란도란 사회적 협동조합 출자 또는 농업법인 다함원 출자로 참여할 수 있다. 참여자들은 도란도란 돌봄서비스 이용 또는 가정 요양보호입소할 수 있다. 노후생활을 위한 집짓기(자립기, 간병기, 임종기 주택)에 관심 있는 사람은 다함원출자로 참여할 수 있다. 누구라도 모두의 더 나은 돌봄 커먼즈를 위한 십시일반 및 후원할 수 있다.
• 문화․예술 커먼즈 :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는 사회적협동조합이 주관한다. 단비 교회 및 농업법인 다함원의 시설을 이용한다. 방문자와 이용자들이 나름대로 다양하고 자유로운 문화․예술 활동 및 프로그램 수행할 수 있다. 누구라도 단비 커먼즈에 맞는 문화․예술 프로그램(갤러리, 음악회 등)에 참여할 수 있다. 누구라도 실비이용료와 십시일반 그리고 후원에 참여할 수 있다.
• 쉼과 영성 커먼즈 : 단비 교회(또는 경청의 집)운영위원회가 주관한다. 단비 교회 및 농업법인 다함원의 시설을 이용한다. 방문자와 이용자들이 나름대로 다양하고 자유로운 영성프로그램 수행할 수 있다. 누구라도 단비 커먼즈에 맞는 생활영성 프로그램 및 생명생태농업 영성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누구라도 헌금과 후원 및 실비이용료 그리고 십시일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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