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예수의 비유』

예수의 큰 잔치 비유 - 지배체제 기득권자들의 만찬을 뒤집고 모욕하다,하나님나라 무지렁이들의 큰 잔치.

희년행동 2022. 7. 11. 21:15

예수의 큰 잔치 비유

지배체제 기득권자들의 만찬을 뒤집고 모욕하다,

하나님나라 무지렁이들의 큰 잔치.

누가복음 14:15-24

 

읽기-1

 

그러자 예수가 그 사람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 했다. 그리고 그가 잔치 시간()에 초청받은 사람들에게 초대 말을 전하려고 자기 종을 보냈다.

오십시오!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 같이 핑계를 대며 거절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람이 그 종에게 말했다.

나는 밭을 샀소. 그러니 그 밭을 보러 가지 않을 수 없구려! 청컨대 당신은 나를 용서하시오.”

다른 사람도 말했다.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소!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부려 보러 가는 길이오. 청컨대 당신은 나를 용서하시오

또 다른 사람도 말했다.

나는 장가들어 아내를 맞이했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갈수 없소!”

그 종이 돌아와서 그의 주인에게 그대로 전했다. 그때, 집주인이 화가 나서 그의 종에게 명령했다.

너는 빨리 큰 길들과 동네 골목들로 나가라. 그리고 가난뱅이들과 지체장애인들과 시각장애인들과 다리 저는 못난이들을 이리로 데리고 와라!”

그 후, 종이 말했다.

주인님, 당신이 분부하신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종을 향하여 말했다.

너는 길들과 담장들 안으로 가라! 그래서 내 집이 가득 채워지도록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라!”

 

읽기-2

 

참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오! 초청받았던 저 남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내 잔치에 참여하지(맛보지) 못할 것이오!”

 

 

낱말풀이

 

* 큰 잔치(또는 큰 만찬) : 데이프논 메가 δεπνον μέγα

* 변명하며 사양하기 시작했다 : 파라이테이스타이 παραιτεσθαι, ‘파라 παρά ~함께 + 아이테오 ατέω 요청하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이다.

* 나는 갈 수 없소. : 우 뒤나마이 엘테인 οδύναμαι λθεν

* 가난뱅이들 프토쿠스 πτωχούς, 지체장애인들 아나페이루스 ναπείρους, 시각장애인들 튀플루스 τυφλούς, 다리 저는 못난이들 - 콜루스 χωλούς

* 길들과 담장들 안으로 길들과 담장들을 따라 집집마다 : 에이스 타스 호두스 카이 플라그무스 ες τάς δούς καί φλαγμούς

*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라 : 아낭카손 에이스엘테인 νάγκασον εσελθεν

 

 

 

 

들어가는 말

 

본문비유에서 큰 잔치는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끼리끼리 손님들을 청하여 함께 먹는 만찬이었을 것이다. 만찬은 서로 사귀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즐기는 저녁식사 모임이다. 그렇지만 고대사회의 만찬은 다른 이들을 향하여는 철저하게 차별되고 닫혀 진 끼리끼리의 식탁모임이다. 이러한 만찬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부자들만의 즐거움이었다. 21C 우리시대로 치면 여의도 정치꾼들이 고급식당에서 여는 정치모임이거나, 정부 고위관료들과 재벌들의 비밀스러운 회식자리와 같았을 것이다. 정부 고위관료와 여야 국회의원, 재벌·대기업회장 등, 끼리끼리의 그렇고 그런 만찬모임은 정치·경제 뉴스의 가십(gossip) 거리로 널리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일쑤이다.

21C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할 찐대, 고대 제국주의 지배계층의 만찬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만찬은 철저하게 부와 권력의 크기에 따라 서로의 사익을 주고받는 계급정치와 독점착취경제 관계를 믿음직하고 도탑게 하는 자리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지배계층과 하층민중이 뒤섞여 벌이는 만찬이 있다면, 그것은 시대의 지배체제에 대한 반역이다. 또한 그것은 거꾸로 시대의 지배체제에 대한 하층민중의 혁명일 것이다. 만일, 지배계층이 하층 민중을 자신의 만찬에 초대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속한 지배계층과 지배체제에 대한 모욕이다. 더불어 그것은 스스로를 지배계층과 지배체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거대한 자기변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할 때, 예수가 갈릴리 민중들과 어울려 함께 벌여온 하나님나라 밥상공동체는 너무도 분명하게 로마제국 지배체제 기득권자들의 만찬을 모욕하고 뒤집는 민중혁명이다. 또한 예수의 밥상공동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뚜렷하게 민중계층의 위치를 갖는다. 예수의 공동체밥상이야말로 가난한 농부와 어부, 세리와 죄인들, 과부와 고아와 여성, 심지어 창녀들까지 함께 어울리는 철저한 하층민들의 밥상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큰잔치 비유는 예수의 밥상공동체 곧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큰 잔치에 대한 신앙은유이다. 이제, 본문비유를 좀도 자세히 읽고 해석하면서, 예수의 큰잔치 비유에 숨겨진 신앙은유들을 헤아려보기로 한다.

 

이끄는 말

 

우리는 본문비유에 대한 평행본문으로 마태복음 22장에 기록된 왕실 혼인잔치 비유를 알고 있다. 성서학자들은 두 가지 예수의 잔치비유의 출처에 대하여 마태와 누가가 따로따로 자기들만의 문서자료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물론, 예수는 하나의 잔치비유를 이야기 했을 것인데, 여러 사람들의 입말로 이곳저곳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두 갈래 이야기로 나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 두 갈래 이야기중 하나를 큰잔치 비유로 기록했을 것이고마태는 다른 한 갈래 이야기를 자신의 복음서에 왕실 혼인잔치 비유로 기록했을 것이다.

이렇게, 두 비유의 저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사상에 따라 예수의 큰잔치 비유에 자신들의 생각과 의지를 더하여 이야기를 꾸미고 손질한 후, 자신들의 복음서에 기록했다. 이점에서 누가는 자신의 생각을 비유에 앞서서 머리말(14:14)로 덧붙였고, 비유의 핵심내용인 주인의 새로운 큰잔치 초대부분‘(21절에서 23절까지)을 자신의 신앙사상에 따라 새롭게 꾸며서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성서학자들은 누가복음 큰잔치 비유가 예수의 비유의 원형에 더 가깝다고 평가한다. 이제 하나하나 큰잔치 비유를 읽어가며 비유의 하나님나라 은유들을 찾아나서 보자.

그런데 이렇게 21C 우리시대의 독자들이 본문비유의 은유를 찾아 나서려 할 때,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비유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을 독자들의 삶의 자리에서 상상하고 되새겨 보는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어떤 사람이 큰 만찬 곧, 끼리끼리의 호사스러운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손님들을 초청 했다는 이야기의 첫 마디에서 자신들의 삶의 마당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의 비유 이야기에 대해 그저 심드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는 그냥 만찬이라고 하지 않고 데이프논 메가(deipnon mega δεπνον μέγα) - 큰 잔치, 또는 큰 만찬라고 허풍떨면서 말한다. 물론, 예수는 본문비유의 큰 잔치를 무슨 종교절기에 따르는 공동체잔치라고 말하거나, 한 마을을 떠들썩하게 할 혼인잔치로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는 로마제국 지배계층 사이에서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벌어졌을 만찬큰 잔치-큰 만찬이라고 허풍스레 떠벌린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이거 뭐야라고 관심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다가 예수는 큰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잔치참여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물론, 대부분의 만찬들은 이미 오래전에 초청하는 사람과 초대받는 이들 사이에서 만찬참여 약속이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다. 다만, 만찬을 베푸는 사람이 만찬시간에 사람을 보내어 초청받은 이들을 부르는 것은 의례적인 만찬 예절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비유 이야기의 첫마디에서 큰잔치라고 너스레를 떨더니, 천만 뜻밖의 초청받은 이들의 잔치참여 거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변명하며 사양하기 시작했다.”

큰 잔치에 초청받은 이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잔치참여를 거부했다. 모두가 함께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말도 안 되는 핑계들을 대며 잔치참여를 거부했다. 이쯤해서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비유 이야기의 흐름의 심각성을 깨닫고 술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예수 시대의 만찬이 갖는 사회정치경제적 역할과 실체를 잘 알고 있는 비유의 청중들은 예수의 이야기에 귀를 세우고 갖가지 반응들을 내어놓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21C 우리시대의 독자들도 예수의 큰잔치 비유에 대하여 비유의 청중들처럼 질문해 볼 수 있다.

큰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왜, 하나같이 잔치참여를 거부할까?”

사실, 고대사회에서 만찬에 초청받은 이들의 만찬참여 거부는 만찬을 베푸는 사람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는 행위이다. 그럴 경우 만찬을 베푸는 사람과 초청받은 이들 사이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질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만찬주인과 초청받은 사람들의 지배체제 안에서의 계층위치에 따라 지배체제의 권력관계 시스템에까지 큰 위기를 불러들일 수 있다. 실제로, 예수시대의 로마제국 지배체제 내부자들의 끼리끼리 만찬은 피라미드 계층 후원사회 구조 안에서 부와 권력과 정치관계를 조정하고 공유하는 중요한 삶의 방식이었다.

따라서 본문비유에서 만찬에 초청받은 이들의 만찬참여 거부는 비유의 청중들에게 천만 뜻밖의 낯설고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천만뜻밖의 낯설음과 이해 할 수 없음으로 인해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의 반응도 뒤죽박죽 이었을 것이다. 또 한편 로마제국 지배체제 안에서 뿌리내리고 커 나가던 초대 교회들에게도 큰 잔치 비유는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비유였다. 나아가 초대교회에 이어 이천년 서구 기독교회 역시도 예수의 큰 잔치 비유 읽기와 해석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저자는 본문비유의 앞 단락에 낮은 자리에 앉으라,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등, 누가복음 신앙공동체의 만찬예절과 윤리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또한 저자는 큰 잔치 비유를 종말론적 메시아 만찬 알레고리로 이해하고 그 틀에 비유의 내용을 꿰어 맞췄다.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이 시대와 땅이 심판 받은 이후, 하늘에서 누리는 천국만찬으로 본문비유를 이해하고 해석하여 받아들였다. 이처럼 로마제국 지배체제 안에서 예수의 큰잔치 비유에 대한 초대교회의 메시아 천국만찬 알레고리이해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벌이는 임금비유에 잘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저자가 예수의 큰 잔치 비유를 자기 신앙공동체의 만찬예절과 종교윤리’, 더불어 종말론적 메시아 천국잔치 알레고리로 이해하고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예수의 비유의 참 뜻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큰잔치 비유의 핵심은유가 큰잔치에 초청받은 이들의 만찬참여 거부에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큰잔치 비유의 청중들과 독자들이 맞닥뜨리는 초청받은 이들의 천만뜻밖의 만찬참여 거부의 낯설음과 어리둥절함속에서 비유의 숨겨진 놀랍고 새로운 은유가 깊고 넓게 퍼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비유 이야기의 흐름을 통하여 초대받은 이들이 늘어놓는 말도 안 되는 잔치참여 거부의 변명들을 하나하나 까발린다. 예수가 초대받은 이들의 잔치참여 거부의 속내를 까발리는 말을 내 뱉을 때마다, 청중들 사이에서는 탄식과 웅성거림의 속엣말들이 들끓어 올랐을 것이다.

첫 번째 사람이 그 종에게 말했다. 나는 밭을 샀소. 그러니 그 밭을 보러 가지 않을 수 없구려! 청컨대 당신은 나를 용서하시오.”

이미 밭을 샀는데, 그 밭을 보러가지 않을 수 없다니? 고대 농경사회에서 모든 생산수단의 밑바탕은 오로지 땅 뿐이었을 터, 누구든지 남의 밭을 사들이면서 그 밭에 대해 이모저모 따져보고 판단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큰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중, 첫 번째 사람의 잔치참여 거부 핑계꺼리야말로 비유의 청중들을 놀라게 하고, 어이없어 하게 했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 때문에, 큰 잔치에 초대 받은 첫 번째 사람의 입을 빌려서 어이없는 잔치참여 거부의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을까? 여기서 이런 질문을 통하여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과 독자들은 얼마든지 큰잔치 비유에 숨겨진 은유들을 찾아내거나 상상할 수 있다. 사실, 유대인들의 히브리 야훼신앙 전통 안에서 땅은 결코 개인이 사고 팔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땅은 야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대교 야훼신앙의 밑바탕은 이집트 파라오 노예제국으로부터 탈출한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정의·평등 공동체사회이다. 야훼신앙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정의·평등 공동체사회의 신앙과 삶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나아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야훼신앙 실천행동으로써, 정의·평등 공동체 삶의 밑바탕은 오롯이 땅은 야훼 하나님의 것이라는 공동체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집트 파라오 노예제국으로부터 탈출한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후손으로써, 야훼신앙 토지정의에 따라 땅을 사유재산처럼 마음대로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라도 땅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생명 공동체의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고대사회에서는 직접 땅을 가꾸는 농부로 살아가든지, 떠돌이 목축을 하든지, 도시의 소상공인으로 살든지, 땅에 기대지 않고는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 사회에서는 히브리 야훼신앙 토지정의가 더욱 귀하다. 땅이 있어야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온전한 생명살이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땅은 거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문명이나 상품이 아니다. 그래서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이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는 사유재산이 아니다. 땅은 대대로 인류가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토지 공개념이야말로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야훼신앙 진실의 핵심이다.

이렇듯이, 예수는 큰 잔치 비유에서 초대받은 첫 번째 사람의 입말을 빌려 천만 뜻밖의 만찬참여 거부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럼으로써,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하여 기득권을 누려온 유대 종교사회 기득권계층의 반 야훼신앙 행태를 꾸짖는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 야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볼모로 삼아, 대지주로써의 부와 권력을 누리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엘리트 계층의 삶의 태도를 꼬집고 조롱한다.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면서 갈릴리 등, 모든 유대 땅에서 상업영농 또는 기업영농으로 부를 쌓아올리는 대지주와 대상인들의 삶을 트집 잡고 따진다. 예수는 큰 잔치에 초대받은 첫 번째 사람의 잔치참여 거부와 변명을 통하여 로마제국 지배체제 1% 내부자들이 땅을 독점하고 부를 쌓는 피라미드 약탈경제의 실체를 까발린다.

이어서 예수는 내친김에 큰 잔치에 초대받은 두 번째 사람의 입을 빌려 비유 청중들이 듣기에도 허풍스러운 잔치참여 거부의 두 번째 변명을 늘어놓는다.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소!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부려 보러 가는 길이오. 청컨대 당신은 나를 용서하시오

예수는 두 번째 사람의 잔치참여 거부를 변명하면서 한꺼번에 겨릿소 다섯 쌍을 샀다고 한다. 당장에라도 밭을 갈 수 있는 일소 열 마리를 샀다는 것인데, 이미 부리고 있는 겨릿소들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큰잔치 참여를 거부한 두 번째 사람은 대지주였음이 분명하다.

이렇듯이, 대지주인 두 번째 사람이 굳이 새로 산 겨릿소들을 손수 부려 보러 가야겠다며 잔치참여를 거부하는 것은 큰 잔치 주인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만찬은 저녁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큰 잔치에 초대받은 두 번째 사람은 낮에 자기 할 일을 하면 그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구약성서 시대의 유대 땅에서라면 대다수의 자유농민들이 겨릿소 한 두 쌍을 부리는 것으로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자유농민들에 의한 자작 영농이야말로 히브리 야훼신앙 정의평등 공동체 사회에 딱 걸맞은 영농행위이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큰 잔치 비유의 세 번째 사람은 장가들었다는 핑계를 대며 아예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는 말조차 없다.

나는 장가들어 아내를 맞이했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갈수 없소!”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결혼하고 일 년이 지나지 않은 남자들을 전쟁터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지중해세계 소제국주의 국가들의 틈바구니에서 히브리 해방노예들이 정의평등 공동체사회를 건설하고 확장해 나가기 위한 사회공동체적 배려였다. 왜냐하면,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정의평등 공동체사회 미래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가정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내는 것이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장가를 갔기에 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세 번째 사람의 얼토당토 않는 변명에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왜, 이렇게, 큰 잔치 비유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갈까? 로마제국이나 유대사회에서 잔치에 초청받은 이들이 잔치참여를 거부하는 것은 잔치의 주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에서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의 잔치참여 거부는 로마제국과 거기에 기생하는 유대 종교사회 지배체제 안에서 유례가 없는 아주 오만불손한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큰 잔치에 초청받은 세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잔치 참여를 거부하게 하며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는 것으로 비유 이야기를 이끌어 왔다. 예수는 큰 잔치에 초청받은 이들의 잔치참여 거부를 통하여 큰 잔치의 주인을 모욕하고 왕따 시킨다. 그럼으로써, 큰 잔치의 주인을 잔치에 초청받은 이들이 속한 지배체제 내부자 계층에서 쫓아낸다. 잔치 주인과 잔치에 초청받은 이들이 서로의 이익을 주고받고 권력을 나누는 제국주의 지배체제 기득권정치·경제·사회의 믿음직스럽고 도타운 만찬교제와 사귐을 끝장낸다.

이점에서, 예수 비유의 청중들은 잔치에 초청받은 이들의 천만뜻밖의 잔치참여 거부라는 낯설고 얼떨떨한 비유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청중들은 이제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라는 안타까움으로 비유의 결말을 몹시 궁금해 했을 것이다. 그런데 비유의 청중들 사이의 이러한 궁금증과 안타까움이야말로 큰 잔치 비유의 핵심은유가 숨겨진 자리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부분의 유대인 청중들은 잔치에 초청받은 이들로부터 잔치참여를 거부당함으로써 큰 모욕과 왕따를 당한 잔치주인이 어떻게 행동할지 몹시 궁금했을 것이다. 아마도 비유의 청중들은 잔치주인이 조용하게 이 사건을 덮고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유의 잔치주인은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속한 지배계층으로부터 당한 모욕과 왕따를 곱씹으며 조용히 미래를 엿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잔치주인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로부터 당한 모욕과 왕따가 널리 퍼져서 크게 알려지는 날에는 지배계층 안에서 잔치주인의 위치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청중들의 이러한 생각과 기대를 무시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유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 간다.

그 종이 돌아와서 그의 주인에게 그대로 전했다. 그때, 집주인이 화가 나서 그의 종에게 명령했다. 너는 빨리 큰 길들과 동네 골목들로 나가라. 그리고 가난뱅이들과 지체장애인들과 시각장애인들과 다리 저는 못난이들을 이리로 데리고 와라! 그 후, 종이 말했다. 주인님, 당신이 분부하신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종을 향하여 말했다. 너는 길들과 담장들 안으로 가라! 그래서 내 집이 가득 채워지도록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해라.”

이제야말로 예수는 큰 잔치에 초청받은 이들의 천만뜻밖의 잔치참여 거부의 낯설음과 어리둥절함을 통하여 예수의 하나님나라 밥상공동체의 실체를 증언하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지배체제 기득권세력의 만찬을 뒤집고 모욕하다, 무지렁이들의 하나님나라 큰 잔치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예수의 큰잔치 비유에 숨겨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은유이다. 예수는 큰잔치 비유의 청중에게, 나아가 독자들에게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밥상공동체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증언한다. 그것은 로마제국과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종교사회 기득권세력들의 어둠속 끼리끼리의 닫혀 진 만찬과 전혀 다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밥상공동체에서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들, 지배체제 기득권세력과는 전혀 다른 계층, 이 땅에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이 크게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이미 예수와 갈릴리 민중들이 함께해 온,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밥상에서 날마다 실현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다.

예수는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밥상을 큰 잔치 비유의 은유 속에 숨겨둠으로써, 도리어 잔치참여를 거부하고 얼토당토않은 변명을 늘어놓는 지배체제 기득권세력을 모욕하고 조롱한다. 이로써, 큰 잔치의 주인은 잔치에 초청받은 이들의 잔치참여 거부로 말미암아 모욕당하고 왕따 당하며 지배체제 내부자 위치에서 쫓겨났으나, 이제야말로 오롯이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밥상공동체 큰 잔치의 주인으로 자기변혁을 선언한다. 그럼으로써, 큰 잔치의 주인은 도리어 제국주의 지배체제의 끼리끼리 만찬을 모욕하고 그 만찬에 초청되었던 지배제체 기득권세력의 계급위치를 무너뜨리고 흩어버린다. 그러므로 예수의 큰 잔치 비유에서처럼 지배체제 내부자계층이 밑바닥 민중들을 자신의 잔치에 초대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속한 지배체제와 기득권계층에 대한 모욕으로써, 스스로 지배체제 내부자계층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자기변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예수의 큰 잔치 비유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비유의 독자들은 비유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먼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 잔치야말로 시대의 지배체제와 기득권계층의 만찬을 모욕하고 뒤집어엎는 혁명이라는 신앙은유이다. 큰 잔치 비유에서 예수가 명백히 밝히려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 잔치야말로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세력의 끼리끼리 만찬을 모욕하고 뒤집어엎는다라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잔치에서는 초청받은 자들의 거부와 초청받지 못한 이들의 영접이 뒤바뀌어 일어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큰 잔치는 가난뱅이들과 지체장애인들과 시각장애인들과 못난이들 등, 종교사회적으로 무의미하고 성가시며 소외된 자들의 공동체잔치이다. 또한 하나님나라 잔치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 예수의 밥상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잔치에 참여하려는 자는 지금 여기서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예루살렘 유대 종교사회 엘리트계층인 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밥상공동체를 통한 하나님나라 공동체잔치에 응할 뜻이 전혀 없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능숙한 성경말씀과 유대 종교사회 전통으로부터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 큰 잔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 하나님나라의 큰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고대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실제로, 예수와 가난한 민중들의 밥상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나라 큰 잔치가 실체를 드러낸 지금, 도리어 그들은 이기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나라 큰 잔치 참여를 거절한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잔치는 유대 종교사회에서 무의미하고 성가시며 소외된 자들의 잔치가 될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큰 잔치 비유의 주인은 종들에게 너는 빨리 큰 길들과 동네 골목들로 나가서 가난뱅이들과 지체장애인들과 시각장애인들과 못난이들을 이리로 인도해 오라라고 한다. 여기서 비유의 독자들은 예수신앙 공동체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민중들에게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여 많은 결실을 맺는 필연성을 되새기게 된다. 또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이 유대 종교사회 기득권층을 지나, 널리 로마제국 민중들에게까지 전파된 것을 떠올리게 된다.

더 나아가 예수는 큰 잔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나라 공동체잔치를 모든 소외계층들에게 널리 열려진 잔치로 확대한다.

주인님, 당신이 분부하신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종을 향하여 말했다. 너는 길들과 담장들 안으로 가라! 그래서 내 집이 가득 채워지도록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해라.”

큰 잔치의 주인은 종에게 길들과 담장들을 따라 집집마다 가서소외된 이들을 이끌어 내오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이 유대 경건한 남자들의 경계를 지나, 유대 종교사회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떠돌이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와 부녀자들을 넘어,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세리와 창녀들에게까지 전파되는 상황을 분명하게 가리켜 보여준다. 크고 작은 길들로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담장 안으로 들어가서 이웃의 눈길에 뜨일세라 숨겨진 사람들까지, 세상의 모든 못난이들을 초대하는 것이 하나님나라 공동체잔치이다. 한마디로 우리 정치경제사회의 삭제된 존재들을 우리 삶의 마당으로 불러오기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의 큰 잔치 비유 안에는 21C 한국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뚜렷한 신앙진실이 있다. 참으로, 큰 잔치 비유는 21C 한국교회에 대한 신앙경고이며 신앙 심판이다.

참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오! 초청받았던 저 남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오!”

이러한 예수의 큰 잔치 비유의 신앙진실은 한국교회의 반인권, 반 생명, 반 평화 신앙행태에 대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신앙철퇴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4.16 세월호참사 유가족의 고통을 외면하고 세월호참사 진실 찾기 외침을 모욕해 왔다. 장애인의 인격과 생존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신용불량자 등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삶의 고통을 외면하는 불신앙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성폭력피해자, 동성애자 등 소외계층 소수자들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고 억압하며 차별해 왔다.

두 번째, 예수의 큰 잔치 비유는 아주 분명하고 뚜렷하게 예수의 밥상공동체의 민중성을 하나님나라 복음의 핵심내용으로 증언한다. 예수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 엘리트계층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어울렸다. 예수는 의인들이라고 뽐내는 유대 종교사회 엘리트 기득권계층보다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잘나고 부유한 이들보다 못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공동체밥상을 차렸다. 예수는 유대 종교사회 기득권세력들이 아무런 노동도 없이 사람의 필요와 쓰임을 약탈하고 독점하여 부와 자산을 늘려나가는 행태를 보고 경험했다. 반 야훼신앙 퇴행과 이기적인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갈릴리 민중들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초청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행위들을 보고 경험했다. 따라서 예수는 유대 종교사회에서 무의미하고 성가시며 소외된 모든 못난이들을 기꺼이 하나님나라 밥상공동체로 맞아들였다.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행동과 처신이 하나님의 뜻이고 야훼신앙의 진실이라고 확신했으며, 이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큰 잔치 비유를 이야기 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시대의 만찬은 로마제국 지배체제 내부자들, 경제적 유산계급들의 전유물이었다. 초저녁에 시작하는 만찬은 유산계급의 주요한 밥상차림이다. 만찬은 특별한 손님들끼리 서로서로 권력과 이익, 정치음모와 술수를 주고받는 잔치로 아주 적합하다. 만찬을 통하여 끼리끼리 주고받은 기득권관계를 형성하고, 서로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나누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렇게, 만찬은 서로 초대하고 초대받는 기득권관계 안에서 지배계급의 위치, 명예의 위치, 사익과 실리의 위치, 종교의 위치, 이데올로기의 위치를 서로 막힘없이 트는 음모와 술수의 자리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의 하나님나라 밥상공동체는 일상적이고 무계급적이며 무조건적인 공동밥상차림이다. 참여하는 사람들도 소작농민, 어부, 농노, 세리와 죄인, 여성과 과부와 고아, 심지어 창녀들까지 각양각색의 하층 민중들이었다. 이들은 로마제국 지배체제에서, 유대 종교사회에서 무의미한 자들이고 성가신 자들이며 소외된 자들이다. 이렇듯이, 예수는 사람들의 계급적 위치, 종교적 위치, 실리적 위치, 이데올로기적 위치 등을 전혀 따지지 않고, 누구라도 함께 어울려 공동체밥상을 차렸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밥상은 참으로 예수시대의 종교율법사회적 관습과 전통을 어기는 것으로써 일종의 범죄행위이다. 나아가 예수시대 로마제국의 지배체제와 유대 종교사회 기득권체제를 뒤집어엎는 반역행동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예수시대의 종교율법사회 엘리트들로부터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욕을 먹었다. 그리고 끝내 예수는 로마제국과 유대 종교사회 기득권자들에게 체제전복자로 몰려 십자가처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맺는 말

 

누가복음 큰 잔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신앙은유는 너무나도 뚜렷하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 밥상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지배체제와 기득권세력의 끼리끼리 만찬에 대한 뒤집어엎음이다. 맘몬자본 권력과 거기에 기생하는 종교관료정치 체제에 대하여 저항하고 그것을 변혁하는 삶의 운동이다. 시대의 지배체제 기득권자들의 만찬은 부와 권력과 정치의 독점을 위한 음모와 술수의 자리이지만, 민중들의 공동체밥상은 시대의 고난과 아픔에 대한 소통과 참여와 연대의 대동 세상을 여는 공동체 큰잔치이다.

이처럼 예수가 큰 잔치 비유를 통하여 은유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 공동체 잔치야말로 시대의 지배체제와 기득권계층의 끼리끼리 만찬과 전혀 다른,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대안공동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나라 공동체잔치는 가난뱅이들과 지체장애인들과 시각장애인들과 못난이들 등, 정치종교사회적으로 무의미하고 성가시며 소외된 자들의 잔치이다. 또한 이 하나님나라 공동체잔치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 예수신앙인들의 공동체밥상을 실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영원한 하나님나라 잔치를 기다리고, 바라며, 참여하려는 사람조차도 지금 여기, 이 땅에서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예수를 따라, 예수처럼,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과 함께 공동체밥상을 차리는 예수의 큰 잔치 비유의 주인처럼, 자기변혁의 길을 가야만 한다. 자기만 옳다고 뽐내는 종교사회 엘리트보다, 잘나고 부유한 이들보다, 못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공동체밥상을 차려야 한다. 신자유주의 독점 금융자본세상의 무의미하고 성가시며 소외된 모든 못난이들을 기꺼이 우리 삶의 동반자로 맞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