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예수의 비유』

포도원 품꾼비유 - 하나님나라 경제의 최저임금, 생활임금, 한 데나리온

희년행동 2022. 7. 11. 21:10

포도원 품꾼비유 

하나님나라 경제의 최저임금, 생활임금, 한 데나리온

마태복음 20:1-15

 

읽기

 

참으로,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날품팔이들을 고용하러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 집주인은 날품팔이들과 더불어 하루 한 데나리온을 합의한 후 날품팔이들을 자기 포도원으로 보냈다.

그런데 집주인은 아홉시 경에 나가서도 일거리가 없어 인력시장에서 서성이는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그래서 집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도 포도원으로 가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들에게 정당한 것을 주겠소!”

그래서 그들이 갔다. 다시, 집주인이 열두시와 오후 세시 경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했다.

그런데 또, 집주인은 오후 다섯 시경에 나가서 서성이는 다른 사람들을 찾았다. 그리고 집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일거리도 없는 당신들은 왜, 여기서 하루 온 종일 서성이고 있소?”

그들이 집주인에게 대답했다.

왜냐 구요? 아무도 우리를 고용해주지 않습니다.”

집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도 포도원으로 가시오.”

저녁때가 되어서, 포도원 주인이 그의 마름(청지기)에게 지시했다.

날품꾼들을 불러서, 맨 나중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맨 처음사람들까지 그들의 품삯을 주어라!”

그런데 오후 다섯 시 경에 온(고용된) 사람들이 나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러자 맨 처음에 온 사람들이 나와서 더 많이 받겠구나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그들도 각자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러자 그들은 (품삯을) 받고나서 집주인을 대항하여 불평을 늘어놓았다.

맨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했잖소! 그런데 그들을 온종일 무거운 짐을 나르고 뙤약볕을 견뎌내며 일한 우리와 똑같이 대한단 말이오!”

그러나 집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친구여,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하지 않았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을 합의하지 않았나?

그대는 그대 것이나 받아 가게! 그런데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들에게도 그대와 똑같이 주고 싶네! 내가 내 것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 합당치 않단 말인가? 혹시, 그대의 눈길이 험악한 것은 내가 선하기 때문인가?”

 

낱말 풀이

 

* 날품팔이들을 고용하러 : 미스토사스타이 μισθώσασθαι, ‘미스토오 μισθόω 품을 사다라는 동사의 부정사형인데, 이 동사는 미스토스 μισθός 품삯이라는 낱말에서 유래한다.

* 집주인 : 오이코데스포테 οκοδεσπτ

* 하루 한 데나리온을 합의 한 후 : 쉼포네사스 συμφωνσας, ‘σμ 함께 + 포네오 φωνέω 소리치다, 떠들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날품팔이와 고용주들로 왁자지껄한 인력시장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 세시 : 트리텐 호란 τρίτην ραν, 유대인들은 관습에 따라 일출에서 일몰까지를 12등분해서 시간을 매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3시는 우리 시간으로 9, 6시는 12, 9시는 오후3, 11시는 오후5시이다.

* 일거리가 없어 : 알구스 ργούς, ‘아 부정접두어 ἀ + 에르곤 ργον 일거리로 이루어진 합성어 이다. 예나 지금이나 늘 날품팔이 인력시장에는 일자리가 모자란다.

* 정당한 것 : 디카이온 δίκαιον, ‘디카이오스 δίκαιος 정의로운것이 정당한 것이다.

* 포도원 주인 : 호 퀴리오스 암펠로노스 κύριος μπελνος

* 불평을 늘어놓았다. : 에공귀존 γόγγυζον, 의성어로써 궁시렁 궁시렁 거리며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모양을 나타낸다.

* 우리와 똑같이 : 이소스 헤민 σους μν, 이소스 σος ~ 같은, 동등한

* 그대는 그대 것이나 받아가게. : 알론 토 손 카이 휘파게 ρον τσν καὶ ὕπαγε, 누구도 자기의 일용할 양식을 잃어서는 안 된다.

 

 

 

 

들어가는 말

 

IMF이후, 우리사회에는 시간알바, 일용직, 비정규직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지금 우리나라 임금노동자 2,004만 명 가운데 1,000여 만 명이 알바노동, 비정규직 노동, 비정형 노동자들이라고 한다. 정규직과 똑같이 일하면서도 급여는 정규직의 절반 남짓 받는 것이 비정규직이다. 그런데다 언제 어떻게 해고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늘 불안 속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본인이나 가족 중 누군가라도 중병이 걸리거나 사고라도 당하면 그 즉시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사실, 비정규직이라도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조금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예 직장이 없는 하루벌이 날품팔이들에게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하루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일당. 하루하루 늘어만 가는 빚더미. 헤어날 길 없는 빈곤. 이것이 21C 신자유주의 독점재벌금융자본경제가 만들어내는 우리사회의 실상이다.

한 달에 열흘 또는 보름밖에 일거리가 없는 날품팔이들이 인력시장에 넘쳐나고 있다. 이렇게 자신과 가족의 하루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날품팔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대부업체나 개인사채를 쓰게 된다. 그리고는 혹독한 불법 채권추심을 당하면서 가정마저 파탄나기 일쑤이다. 지금 당장 교육비와 병원비 등 급한 생활비가 필요해서 사채업자를 찾을 수밖에 없는 저소득빈곤층 금융소외계층이 500만 명에 이른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가장 급하고 필수적인 국가 경제정책은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바로 최저임금 1만원쟁취이다. 착취와 다름없는 최저임금을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는 생활임금으로 만드는 것이다. 지금, 지구촌 신자유주의 독점자본독점기업 국가들에서조차 최저임금을 생활임금 화 하려는 사회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오직, 대한민국 정부 관료들과 국회와 정치권, 그리고 재벌들만 모르는 체 딴청을 부린다. 아무리 혹독한 독점자본기업세상에서라도 자신의 노동만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어서, 고리대금업자의 채무노예로 전락해야만 하는 사회는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그것이 바로 이 땅의 하나님나라이다. 그래서 예수는 본문비유를 통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을 만큼의 최저임금이야말로 하늘 뜻이라고 선포한다 하루벌이 날품꾼들이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품삯을 받는 것이 이 땅의 하나님나라 경제라고 선언한다. 개인의 능력과 학벌, 직업의 차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품삯을 보장받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이다. 여럿이 함께 살맛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며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핵심이다.

이제, 예수의 포도원 품꾼비유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예수의 육성을 들어보자. 그러기 위해서 좀 더 자세히 예수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끄는 말

 

예수는 본문비유에서 다 드러 내놓고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신앙은유를 밝힌다. 예수는 비유에서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체적 내용을 있는 그대로 드러 내놓는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참으로,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날품꾼들을 고용하러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라고 비유의 말문을 연다. 한마디로, 예수는 비유에서 자신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하여 현실 도피적이고, 관념적이며, 묵시적인 저세상 나라로의 환원을 거부한다.

실제로, 본문비유에서 집주인은 날품팔이들과 함께 하루 한 데나리온을 합의한 후그들을 자기 포도원으로 보낸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가 쉼포네사스’(sumphōnēsas συμφωνσας,)인데 함께 + 소리치다, 떠들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한마디로 이른 새벽 날품팔이 인력시장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렇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산업화이후 IMF를 거치면서 대도시의 골목마다 성황을 이루고 있는 시장이 있다. 바로 날품팔이 인력시장이다. 날품팔이 시장은 이른 새벽부터 오전 내내, 때로는 오후에까지 날품을 사려는 고융주들과 날품팔이들 사이의 품삯 흥정으로 시끌벅적하다.

본문비유는 예수시대에도 날품을 사려는 고용주들과 날품팔이들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인력시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까발린다. 비유의 집주인은 포도원 일거리가 얼마나 급했던지? 이른 아침에 이어, 또 다시 오전 아홉시쯤에도 인력시장으로 나간다. 그리고는 일거리가 없어 인력시장에서 서성이는 다른 날품팔이들을 모아서 자기 포도원으로 보낸다. 그런데 집주인은 낮 열두시와 오후 세시쯤에 나가서도 똑 같은 일을 반복한다. 심지어 집주인은 하루의 노동을 마치기 한 시간 전쯤인 오후 다섯 시에도 날품팔이 인력시장으로 나간다.

그래서 그 때까지도 장터를 배회하는 사람들을 찾아 낸 후, 포도원 하루 품꾼으로 고용한다. 참으로 비유에서 집주인은 이해 할 수 없는 고용주이다. 일거리가 없어서 절절매는 비유의 노동 상황에서 이와 같은 집주인의 포도원 날품팔이 고용은 미친 짓이다. 포도원의 필요한 일손 때문에 날품팔이들을 고용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일거리가 없어 빌빌거리고 있는 날품팔이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그렇다면, 예수는 비유에서 집주인의 포도원 날품팔이 고용행태을 통하여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한마디로 예수는 비유를 통하여 로마제국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임금노예 경제를 꼬집어 까발린다. 무엇보다도 유대 종교·사회의 허울뿐인 야훼신앙 정의평등 공동체의 경제실상을 까발린다. 그럼으로써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에게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야훼신앙 회복을 요구한다. 나아가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유대 종교·사회 기득권계층에 대한 저항으로써, 하나님나라 경제의 최저임금을 제안한다.

사실, 본문비유의 날품팔이 인력시장 상황은 유대인들의 정의평등 야훼신앙에 비추어 너무도 부끄러운 일이다. 야훼 하나님의 정의평등사회에서 떠돌이 날품팔이 인력시장은 너무도 낯선 현상이다. 그러나 지금, 유대 땅은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수탈과 그로인한 경제 불황,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전쟁과 흉년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채무노예로 팔리거나, 하루벌이 날품팔이로 전락한다. 비유의 정황으로 보아 예수시대 예루살렘은 이미 하루살이 날품팔이들이 넘쳐나는 불평등사회로 떨어져 내렸음이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유대인들은 그 옛날 이집트 파라오제국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후손이다. 히브리들은 인류사에서 그 유래가 없는 해방노예 공동체로써 정의·평등 야훼신앙을 실천해 왔다. 물론, 구약성서 히브리들의 정의평등 야훼신앙 이야기는 긴긴 세월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엄연히 사사기는 해방노예 히브리들의 정의평등사회 신앙실천 기록이다. 따라서 예수시대에 이르러서도 정의평등 야훼신앙의 맥은 유대인들의 신앙 심장 속에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야훼 신앙인들에게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기득권 세력들로 인해 야기된 불의·불평등이야말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며 불신앙이었다.

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시대의 유대 종교사회상황은 정의·평등 야훼신앙과 거리가 멀었다. 유대 종교사회는 오래전부터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노예임금 경제로 길들여진 사회였다. 유대 종교정치경제사회 기득권세력들은 로마제국의 착취와 불평등사회구조에 기생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누려왔다. 이러한 유대 종교정치경제사회 현실상황 속에서 예수는 로마제국 맘몬자본 지배체제 임금노예 경제에 맞서는 포도원 주인의 비경제적이고 비현실적인 날품팔이 고용을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유대 종교정치경제사회의 반 야훼신앙 날품팔이 임금노예 경제체제를 매섭고 날카롭게 까발린다. 나아가 포원 주인의 비경제적이고 비현실적인 포도원 날품팔이고용 행태를 하나님나라에 비유함으로써 예수의 새로운 대안세상 실체를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경제의 최저임금, 생활임금, 한 데나리온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데나리온화폐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데나리온은 로마제국의 기본화폐로써 라틴어로는 데나리우스 Denarius’라고 한다. 데나리온은 기원전 211년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전쟁) 가운데서 로마 원로원에 의해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후, 로마제국이 건설되면서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징세와 교역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데나리온은 로마제국 전 지역에서 똑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로마제국 병사의 일일 급여와 자유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통용되었다.

예수시대 예루살렘의 경우도 날품팔이들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경기의 부침에 따라 일거리가 줄어들면 고용주들이 하루에 사분의 일 데나리온까지 품삯을 낮추기도 했다.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랍비 힐렐도 랍비 수업기간 동안 예루살렘에서 하루 이분의 일 데나리온을 받으며 날품팔이로 일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비유의 청중들과 유대 지배계층에게 날품팔이 한 가정의 온전한 하루생계를 위해 한 데나리온 품삯의 보장을 요구한다. 예루살렘 날품팔이의 하루 이분의 일, 또는 사분의 일 데나리온 품삯은 한 가정의 아이들과 여성과 노인들의 굶주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21C 우리사회의 최저임금 1만원보장 요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비유는 오전 아홉시에도, 열두시에도, 심지어는 오후 세시와 오후 다섯 시까지도 일거리가 없어 인력시장에서 서성이는 수많은 날품팔이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지금, 일거리가 없어 인력시장에서 서성이는 날품팔이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까? 지금이 오전 아홉시인데, 아직은 열두시인데, 날품팔이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었을까? 이제 오후 세시가 되었는데, 아니 곧 하루 일과가 끝날 오후 5시인데, 배를 쫄쫄 졸여가면서까지 인력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날품팔이들의 절망과 고통이 이렇게 절절할 수 있을까? 오늘 하루 날품팔이를 공치고 꼼짝없이 굶주려야 할 자식들이 눈에 밟히는데 어쩌란 말이냐! 하루 온종일 자신을 기다렸을 아내와 늙은 부모에게는 무어라 할 것인가? 일거리가 없어 하루 온종일 인력시장을 서성일 수밖에 없었던 날품팔이들이 차마 인력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들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절망과 고통으로 그늘진 우리사회의 인력시장의 모습도 이와 똑 같다.

도대체 왜, 한국교회는 이 날품팔이들의 처절한 절망과 고통을 읽어내지 못하는가? 그러면서도 제멋대로의 비유해석을 통하여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의미를 현실 도피적이고, 관념적이며, 묵시적인 저세상 나라로 되돌리려고 하는가? 도대체 그 속뜻이 무엇인가? 본문비유에서 일거리가 없어 인력시장을 서성이는 날품팔이의 절망과 고통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일뿐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훼방하고 거부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이천년 서구 제국주의 기독교회가 그렇게 해왔다.

이와 관련하여 종종 유대인들에게, 포도원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본문비유에서 포도원은 날품팔이들의 고된 노동의 현장으로 생생하게 증언되고 있다. 예수는 본문비유에서 날품팔이 노동자들의 고단한 포도원 노동을 생생하게 들춰낸다. 본문비유에서 포도원에 들어온 날품팔이들은 온종일 무거운 짐을 날랐다. 날품팔이 노동자들은 뙤약볕을 견뎌내며하루 온종일 노동을 했다. 본문비유의 포도원은 예수시대 로마제국 맘몬자본 지배체제 임금노예 경제의 고단한 노동현장 일 뿐이다. 그러기에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 온 날품팔이들은 맨 나중에 온 날품팔이들을 향하여 분노를 쏟아냈던 것이다.맨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했잖소. 그런데 그들을 온종일 무거운 짐을 나르고 뙤약볕을 견뎌내며 일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한단 말이오?”

그러나 예수는 비유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로마제국의 임금노예 경제체제에 맞서서 하나님나라 삶의 경제, 최저임금, 생활임금, 한 데나리온을 제안하려고 한다. 더불어 유대 종교·정치·경제·사회 현실상황 안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야훼신앙, 정의와 평등세상 회복을 제안한다. 나아가 예수는 유대인 청중들에게 히브리 해방노예 공동체의 후손으로써 야훼신앙 회복을 요구한다. 로마제국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불의와 불평등에 맞서서 저항할 것을 재촉하고 요청한다.

이제, 본문비유의 이러한 신앙은유로써 집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으로 날품팔이들을 모아들이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태도를 바꾼다. 아홉시에도, 열두시에도, 오후 세시에도 포도원 주인은 일거리가 없어 인력시장에서 서성이는 날품팔이들을 자신의 포도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끝내는 일이 다 끝날 시간인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도 인력시장으로 나간다. 이제, 포도원 주인은 희망을 잃고 절망하는 날품팔이들을 휴렌 - 찾아나선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절망과 고통에 빠진 날품팔이들에게 따뜻한 공동체소통과 연대의 말을 건넨다.

일거리도 없는 당신들은 왜, 여기서 하루온종일 서성이고 있소?

왜냐 구요? 아무도 우리를 고용해주지 않습니다.

당신들도 포도원으로 가시오.”

그런데 여기서, 저녁이 되어서도 하릴없이 인력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날품팔이의 고통과 절망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일거리도 없는 당신들은 왜 여기서 하루 온종일 서성이고 있소라는 포도원 주인의 이 물음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 챌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도 하릴없이 인력시장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날품팔이들을 게으르고 무능한 부랑아들이라고 트집 잡아 따지지 않는다. 도리어 하루살이 날품팔이와 그의 가족들의 절망과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함으로써, 그들의 삶의 자리에 연대하고 참여하려는 하나님나라 삶의 경제의 실천의지를 펼쳐 드러낸다.

이와 관련하여 포도원 주인은 날품팔이들에게 정당한 것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어떻게, 얼마나, 정당하다는 것인가? ‘정의로운 것이 정당한 것이다. 하나님나라 삶의 경제의 최저임금, 생활임금은 마땅하고, 정의로운 것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사람의 쓰임과 필요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 삶의 경제의 품삯은 사람의 능력이나 생산성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사람마다의 쓰임과 필요를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포도원 품꾼비유를 하나님나라 비유라고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밝혀 드러낸다. 예수는 비유이야기의 흐름을 통하여 하나님나라 삶의 경제 최저임금, 생활임금을 비유의 핵심은유로 제안한다. 한마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한 시간밖에 일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루 날품팔이를 고용하는 포도원 주인과 같다.

그렇다면, 포도원 주인은 왜, 맨 나중에 온 날품팔이들부터 품삯을 주기 시작했을까? 여기서 많은 해석자들이 으레 그래왔듯이 마지막 심판 때에는 처음과 나중의 서열이 뒤바뀔 것이다라는 구태의연한 해석을 따른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커다란 오류이다. 왜냐하면, 비유에 등장하는 다섯 날품팔이 그룹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자기의 하루 품삯을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맨 처음에 온 날품팔이들은 맨 나중에 온 날품팔이들의 한 데나리온 품삯을 보고 자신들은 더 받겠거니 기대하다가 나중에 크게 실망한다. 그렇더라도,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날품팔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한 데나리온 품삯을 보면서, 불안과 절망감으로 자신들이 받게 될 품삯을 헤아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비유 이야기를 통하여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온 날품팔이들과 오후 5시 맨 나중에 포도원에 들어온 날품팔이들의 품삯지급 순서를 뒤바꾼, 진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는 본문비유의 이야기 흐름을 통하여 청중들의 마음에 갈등과 분노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을까? 예수는 로마제국의 노예임금 경제체제에서 착취와 억압, 불의와 불평등, 절망과 고통에 찌들어진 예루살렘 대중들의 신앙과 삶의 태도를 깨우려한다.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생하며 종교·사회·경제 기득권을 누려온 유대 성전제사 종교 엘리트에 저항하는 예루살렘 민중 스스로의 깨달음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자유와 해방,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야훼신앙을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 비유의 청중들은 로마제국 상업주의와 자본주의 임금노예 경제 체제의 행동양식에 따라 살아왔다. 예수의 청중들은 처음 온 날품팔이들이 나중 온 날품팔이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예수는 비유의 청중들의 그러한 기대를 짓밟았다. 도리어 모두가 정당한 품삯을 받았다라고 선언한다. 이 부분에서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생뚱맞게 하나님나라는 오직 은혜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예수의 비유에서 모두에게 정당한 품삯의 의미가 최후의 심판 때 서열의 뒤바뀜이 아니라는 전제로, ‘하나님 나라는 오직 은혜라는 해석에는 나름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모든 사람에게 정당한 품삯이 지불되었다는 것에 전혀 동의하지도 감동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날품팔이들이 온전한 품삯을 받았다는 것에 놀라고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라고 매우 화가 났을 것이다.

이점에서 본문비유는 에공귀존’(egoggyzon ἐγόγγυζον)라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한다. 이 헬라어 동사는 의성어로써 구시렁구시렁 거리며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모양을 나타낸다. 따라서 21C 독자들이 읽는 본문비유 이야기 안에는 비유에 등장하는 날품팔이들과 비유의 청중들이 함께 섞여서 구시렁거리는 불평불만이 겹쳐서 들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라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 포도원 주인은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에게 조차 하루 품삯을 다 내준단 말이냐? 포도원 주인의 변덕스러운 과시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포도원 주인의 타고난 자비와 관용 때문이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아침 일찍 온 날품팔이들부터 품삯을 주어 보내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을 안 한 날품팔이들부터 보란 듯이 온전한 품삯을 준단 말이냐?”

예수의 비유에서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 나와 일한 사람들과 예루살렘 청중들의 불평불만은 탕자비유에서 큰아들의 항변을 생각나게 한다. 이점에서 두 비유는 다 같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비유로써 세상의 가치와 질서를 뒤집는 하나님나라 삶의 실천행동을 제안한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본문비유에서 친구여 헤타이레’(hetaire Ἑταρε)라는 불친절한 용어를 사용한다. 예수는 종종 말과 행동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다. 예수는 비유의 예루살렘 청중들이 로마제국 식민지 지배체제 상업주의와 자본주의경제 임금노예로 길들여지고 찌들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예수는 자유와 해방,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히브리 야훼신앙을 저버린 청중들을 향하여 친구여라고 비아냥거린다. 참으로 본문비유에서 예수의 어투가 매섭고 날카롭다.

친구여, 나는 그대를 부당하게 대하지 않았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을 합의하지 않았나? 그대는 그대 것이나 받아 가게. 그런데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들에게도 그대와 똑같이 주고 싶네! 내가 내 것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 합당치 않단 말인가? 혹시, 그대의 눈길이 험악한 것은 내가 선하기 때문인가?”

예수는 비유이야기를 통하여 포도원 주인의 품삯 지불을 불공정한 행위라고 성토하는 청중들의 감정과 생각에 에두르지 않고 맞선다. 또 한편 포도원 주인의 터무니없는 관대함을 강조하거나 찬양하지도 않는다. 예수는 가난하고 소외된 날품팔이들에 대한 연민을 통하여 그들의 삶의 상황에 연대하고 참여하려는 포도원 주인의 결단과 실천행동을 돋보이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예수는 비유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도 포도원 주인과 똑같이 결단하시고 행동하신다라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을 포함하여 21C 우리시대의 모든 독자들에게도 포도원 주인과 똑같이 결단하고 행동하라고 재촉하며 요구한다.

그대의 눈길이 험악한 것은 내가 선하기 때문인가?”

21C 신자유주의 독점자본경제 임금노예 체제에서 나와 다른 날품팔이들의 최저임금, 생활임금쟁취 공동체 행동이 나를 화나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가? 깊이 생각하고 헤아려 볼 일이다.

 

맺는 말

 

예수는 누구에게, , 본문비유를 이야기 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본문비유는 하나님나라 비유로써 두개의 핵심 해석의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집주인이 필요에 넘치도록 날품팔이들을 고용하는 것과 모두에게 절실한 하루살이 품삯을 지불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피해 입었다고 생각하는 날품팔이들과 청중들과 독자들의 불평불만이다.

본문비유의 청중과 독자들은 앞의 해석의제와 뒤의 해석의제 가운데서 하나를 강조할 수도 있고, 두 개의 해석 의제를 하나로 연결 지어 강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뒤의 해석의제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 민중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을 선포하기 위하여 본문비유를 이야기 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 땅의 하나님나라 삶의 경제 밑바탕으로써 최저임금, 생활임금인 한 데나리온을 헐뜯고 미워하며 깎아내리려는 예루살렘 종교경제사회 기득권세력의 반 야훼신앙을 트집 잡고 따진다. 그들이 로마제국 식민지 지배체제의 상업주의와 자본주의경제 임금노예체제의 고용주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로마제국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임금노예 경제 안에서 사익을 챙기며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들이다.

나아가 예수는 21C 우리시대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멸시하고 죄인 취급하는 부유한 한국교회를 향하여 본문비유를 선포한다. 무엇보다도 무한경쟁무한독점무한축적무한소비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에서 지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도덕적해이자라고 몰아붙이는 대형교회 교우들을 향하여 한 데나리온 비유를 외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밑바탕으로써 최저임금, 생활임금에 대해 마냥 화가 나 있는 이들을 향하여, 오늘도 예수는 이비유를 이야기한다. 예수의 한 데나리온 비유 이야기야말로 맘몬자본세상의 어찌해볼 도리 없는 임금노예들을 향한 예수의 사랑의 채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