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히브리 성서 속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찾아서
희년신앙의 태동
1. 꿈의 사람요셉,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완결(完結)하다.
창세기 41:14-49, 47:13-26
본문읽기1.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 창세기 41:14-49
파라오가 시종을 보내어 요셉을 불렀다. 그러자 사람들이 재빨리 웅덩이 옥으로부터 요셉을 빼냈다. 요셉이 수염을 밀고 옷을 갈아입고 파라오에게 갔다. 파라오가 요셉에게 말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다. 나는 너에 대해 ‘네가 꿈 이야기를 듣고 그 꿈을 해석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요셉이 파라오에게 대답했다. 말하기를.
“제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평안을 위하여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파라오가 요셉에게 이야기했다.
“보라, 나는 내 꿈속에서 나일강가에 서 있었다. 그런데 보라, 나일 강으로부터 살찌고 매끄러운 어린 암소 일곱 마리가 올라와 갈대밭에서 풀을 뜯었다.
그때 보라, 파리하고 매우 흉한 다른 암소 일곱 마리가 앞선 어린 암소 일곱 마리 뒤를 따라 올라왔다. 나는 이집트 온 땅에서 이 일곱 마리 암소처럼 비쩍 말라 흉한 것들을 본적이 없다.
그런데 비쩍 말라 흉한 암소들이 처음의 살찐 어린 암소 일곱 마리를 먹어치웠다. 살찐 어린 암소들이 비쩍 말라 흉한 암소들 뱃속으로 들어갔는데 ‘살찐 어린 암소들이 비쩍 말라 흉한 암소들 뱃속으로 들어갔는지 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여전히 비쩍 말라 흉한 암소들은 처음 때처럼 흉측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깨어났다.
다시 내가 내 꿈속에서 보았다.
보라, 한 개의 곡식 줄기에서 실하고 좋은 일곱 이삭이 나왔다. 그런데 보라, 실하고 좋은 일곱 이삭 뒤를 따라 샛바람에 바싹 말라비틀어진 일곱 이삭이 자라났다. 그리고 바싹 말라비틀어진 일곱 이삭이 실하고 좋은 일곱 이삭을 삼켜버렸다.
그래서 내가 박사(博士)들에게 말했으나 아무도 나에게 풀어서 알려주는 자가 없었다.”
요셉이 파라오에게 말했다.
“파라오의 꿈은 하나입니다. 그 꿈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파라오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일곱 마리 살진 암소는 일곱 해입니다. 좋은 일곱 이삭도 일곱 해입니다. 그러기에 그 꿈은 하나입니다. 또 그것들의 뒤를 따라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암소 일곱 마리도 일곱 해입니다. 그리고 샛바람에 바싹 말라비틀어진 이삭 일곱도 일곱 해입니다. 그것들은 일곱 해 흉년입니다.
제가 파라오께 말씀드리는 이 사건은 ‘하나님이 하시려고 파라오에게 보여주신’ 그 일입니다. 보십시오. 이집트 온 땅에 일곱 해 대 풍년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해 대 풍년 뒤로 일곱 해 흉년이 일어날 것입니다. 따라서 이집트 땅에서 일곱 해 대 풍년의 모든 것이 잊혀 질 것입니다. 흉년이 땅을 쇠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듯, 뒤따르는 저 흉년 앞에서 그 땅의 일곱 해 대 풍년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흉년이 매우 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꿈이 거듭 두 번 파라오께 되풀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행하시려고 서두르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파라오께서 재주 있고 똑똑한 사람을 골라 뽑아서 그를 이집트 온 땅위에 세우십시오. (이어서) 파라오께서 하실 일은 온 땅위에 감독자들을 임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해 풍년동안 이집트 땅에서 오분의 일 세금을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감독자들이 앞으로 올 그 좋은 풍년세월에 모든 식량을 모으게 하십시오. 감독자들이 ‘파라오의 손아래서’ 도시들마다 식량을 위한 곡식을 쌓고 지키게 하십시오. 그 식량은 이집트 땅에 닥칠 ‘일곱 해 흉년을 위해 그리고 그 땅을 위해’ 감독자들에게 맡겨두십시오. 그래서 흉년에 그 땅이 끝장나지 않게 하십시오.”
이 제안이 파라오와 파라오의 모든 신하들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파라오가 자기 신하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 사람처럼 ‘자기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으랴?”
뒤이어 파라오가 요셉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 모든 일을 알게 하셨으니 너처럼 번뜩이는 영감과 재능을 가진 사람은 없다. 네가 내 집 위에 있을 것이다. 나의 모든 백성이 네 입을 따라 복종할 것이다. 다만 나는 너보다 그 왕좌(王座)만 더 클 뿐이다.”
다시 파라오가 요셉에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너를 이집트 온 땅위에 세운다.”
파라오는 자기 손에서 자기 인장 반지를 빼내어 요셉의 손에 그 반지를 끼워 주었다. 또 요셉에게 고운 모시옷을 입히고 요셉의 목에 금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파라오는 자기 버금마차에 요셉을 태웠다. 그러자 무리들이 요셉 앞에서 ‘아브레크(쉬이 물렀거라)’고 외쳤다. 그렇게 파라오가 요셉을 이집트 온 땅위에 세웠다. 파라오가 요셉에게 말했다.
“나는 파라오다. 너 외에는 어떤 사람도 이집트 온 땅 안에서 자기 손과 발을 높이 들어 올릴 자가 없으리라.”
파라오가 요셉의 이름을 ‘차페나트 파아네아흐’라고 불렀다. 또한 파라오가 요셉에게 ‘온’ 제사장 ‘포티 페라아’의 딸 ‘아스나트’을 아내로 주었다.
요셉이 이집트 땅을 살피러 나갔다. 요셉이 이집트 왕 파라오 앞에 섰을 때 그의 나이 삼십 삼세였다. 요셉은 파라오 앞에서 물러나와 이집트 온 땅을 돌아 다녔다. 그 땅이 일곱 해 풍년동안 풍성하게 곡식을 생산했다. 요셉이 일곱 해 풍년동안 이집트 땅에서 생산된 모든 식량을 모았다. 요셉은 도시들 안에 식량을 저장했다. 그 땅 곳곳에서 그 도시에 잇닿은 밭의 식량을 ‘그 도시 한 가운데’에 저장했다.
요셉이 쌓은 곡식이 바다의 모래더미처럼 많았다. 너무 많아서 셈하기를 그만두기까지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 셈이 한없었기 때문이다.
본문읽기2.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 완결 창세기 47:13-26
온 땅에 먹을거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매우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굶주림이 매우 심했다. 이집트와 가나안 땅이 흉년 앞에서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때에, 요셉은 곡식을 사려는 이들에게 곡식을 팔아 이집트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돈을 긁어모았다. 요셉은 그 돈을 파라오 궁전으로 가져왔다. 그래서 이집트와 가나안 땅으로부터 돈이 말랐다. 그러자 온 이집트사람들이 요셉에게 몰려와서 항의했다.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주시오. 도대체 왜, 우리가 돈이 없다는 것 때문에 당신 앞에서 굶어 죽어야한단 말이오?”
그러자 요셉이 (그들을) 윽박질렀다.
“돈이 다 떨어졌다면 너희 가축들을 내놔라. 너희가 내놓은 가축들에 따라 내가 너희에게 먹을거리를 주겠다.”
하는 수없이 이집트사람들은 그들의 가축들을 요셉에게 가져 왔다. 요셉은 말들과 양떼와 소떼와 나귀들에 따라 그들에게 먹을거리를 주었다.
그렇게 그해에, 요셉이 이집트사람들의 온갖 가축들에 따라 그들에게 먹을거리를 주었다. 그럭저럭 그 해가 다 지나고 그 이듬해에 이집트사람들이 요셉에게 왔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에게 말했다.
“우리는 주께로부터 숨기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돈이든, 가축이든, 짐승들이든, 그것들을 다 주께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쇠락하고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이제는 우리 몸뚱이와 우리 땅 뿐입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우리자신도 우리의 땅도 함께 당신 눈앞에서 죽게 되었는지?
당신이 먹을거리로 우리 몸뚱이와 우리의 땅을 사십시오.
우리와 우리의 땅도 함께 파라오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씨앗을 주십시오.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지 않아야만 ‘땅도 황무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이 파라오를 위해 이집트의 모든 땅을 사들였다. 왜냐하면 이집트사람들이 그들 위에 몰아친 혹독한 굶주림 때문에 그들의 밭을 내어 주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땅이 파라오의 것이 되었다.
그런 후에 요셉이 이집트제국 경계 ‘이 끝으로부터 저 끝으로까지’ 도시들로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을 옮겼다.
그러나 요셉은 온전히 제사장들의 땅만큼은 사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에게는 파라오로부터 나오는 벼슬아치 몫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파라오가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들의 몫을 먹었다. 그런 까닭에 제사장들은 그들의 땅을 팔지 않았다. 요셉이 풀뿌리 농부들에게 선포했다.
“보라, 오늘 내가 파라오를 위해 너희 몸뚱어리와 너희 땅을 샀다.
여기 보라, 너희에게(또는 너희를 위한) 씨앗이 있다.
너희는 파라오의 땅에 씨를 뿌려라.
그리고 너희는 추수 때마다 오 분의 일을 파라오께 바쳐라.
나머지 넷은 너희와 파라오 밭의 씨앗을 위해 너희 손에 있을 것이다.
너희와 너희 집안에 있는 식구들과 너희 어린아이들을 위한 먹을거리로 너희 손에 있을 것이다.”
풀뿌리 농부들이 대답했다.
“당신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눈에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파라오를 위한 노예들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이 파라오 땅의 규칙을 세웠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오 분의 일을 파라오에게 바쳐야하는 이집트 땅의 규칙이다. 그러나 온전히 제사장들의 땅만큼은 예외로 파라오의 소유가 되지 않았다.
본문 이해하기
인류의 수렵채취시대는 원시 공산사회였을까?
인류최초의 인간 종 ‘호모 나레디’(Homo naledi)는 삼백만년 전 ‘남아프리카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 ‘호모 나레디’를 인류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인류는 2백 99만3천 년 전까지 ‘원시공산사회’에서 살았을 것이다. 한편 약 오만 년 전에 지구촌에 나타났다는 ‘호모 사피엔스’를 인류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인류사회는 4만3천 년 전까지 ‘원시 공산사회’였을 것이다. 실제로 인류학자들은 ‘지구촌에 인간종이 나타나고 수렵채취라는 기나긴 인류역사과정’을 원시공산사회로 이해한다. 한마디로 원시공산사회는 사회구성원들이 서로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모든 것들을 서로의 쓰임과 필요에 따라 평등하게 나누는 사회였다.
원시공산사회에서는 ‘남자들이 사냥을 통해서 얻는 것들보다 여자들이 채취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았다. 나아가 여자들이 채취하는 것들이야말로 ‘공동체 쓰임과 필요에 딱 맞는 것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원시공산사회는 ‘모계중심 사회’일 수밖에 없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평등사회일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인류사회는 수렵채취라는 기나긴 인류역사과정을 거쳐 왔다. 그러면서 서로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서로의 필요와 쓰임에 따라 나누는 원시공산사회 유전자를 쌓아왔다.
고대 신용사회와 빚 세상경제
그러나 기원전 5천여 년 전 무렵 고대 지구촌 인류문명사 속에서 농경사회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농경사회 혁명을 통하여 고대 인류문명사 안에 ‘생산수단 및 생산물’이라는 경제개념이 생겨났다. 힘센 남성들 가운데서 지배세력이 나타나 농경사회의 생산수단이었던 땅과 농사도구들을 독점하고 잉여생산물을 착취하고 사유화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권력을 쟁취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나뉘었다. 또 필연(必然)으로 신용제도가 생겨나고 ‘빚세상경제 지배체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실제로 지구촌 인류문명사 속에서 모든 고대문명의 밑바탕은 ‘하나같이 불로소득’이었다. 불로소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빚세상경제 지배체제’에서 만들어졌다. 부와 권력을 독점한 계급이 풀뿌리 사람들에게 빚을 떠맡기고 고리의 이자와 이윤을 빼앗았다. 그렇게 빼앗은 ‘이자와 이윤 등 불로소득’을 쌓아서 ‘사유재산’을 만들었다.
인류문명사 속에서 ‘사유재산 개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인류학자들은 농경사회 혁명이 시작되고 신석기 문명시대부터 사유재산 개념이 나타났다고 이해한다. 농경사회혁명 이후 잉여생산물이 늘어나면서 ‘사유재산 제도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사유재산’이라는 말의 사전의미는 무엇일까?
개인이 독점하고 지배하는 가운데 자유로이 관리하고 사용하며 마음대로 처분 할 수 있는 부 또는 자산이다. 이 사유재산 개념에 딱 막는 자산목록이 하나있다. 바로 ‘채무노예’다. 만약,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을 자산으로 딱 꼽아서 따로 떼어놓고 물건처럼 다룰 수 있다면, 채무노예처럼 값진 사유재산이 따로 없다.
실제로 고대 문명세계에서 땅은 언제까지라도 마음껏 독점하고 지배할 수 없다. 더 힘센 권력자가 나타나면 속절없이 빼앗기거나 고스란히 갖다 바쳐야만 한다. 물건들도 그렇다. 얼마 못가서 낡아지고 망가져 폐기처분해야 한다.
그러나 채무노예는 그렇지 않다. 오래도록 ‘다양한 생산성과 꾸준한 노동능력’을 독점하고 착취할 수 있다. 또 가축처럼 새끼를 낳아서 자연자산증식을 선물한다. 무엇보다도 독점지배와 자유로운 관리 그리고 다양한 쓰임을 통해서 ‘무한 불로소득 창출’이 가능하다. 나아가 노예시장에서 자유롭게 처분함으로써 맘껏 사유재산 권리를 누릴 수 있다.
이렇듯이 ‘채무노예제도’는 고대 문명세계에서 빚세상경제 불로소득의 밑바탕으로써 사회․종교․정치․경제 집단신념체계로 나타났다. 채무노예제도는 그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빚진 죄인’이라는 사회․종교․정치‧경제 이데올로기에 딱 맞는 ‘삶의 질서’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고대 문명세계에서 소작농노 집단은 대부분 ‘오롯이 주인의 땅에 매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채무노예들’이었다. 반대로 전쟁노예 또는 약탈노예들은 언제 어디서든 호시탐탐 저항과 반란을 꾀한다. 따라서 ‘온 가족이 주인의 땅에 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채무노예들’의 생산성이 전쟁 또는 약탈노예들보다 훨씬 더 높았다.
그러므로 고대문명세계에서 빚세상경제 불로소득체제가 그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고리의 빚을 지워 채무노예로 삶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채무노예 제도야말로 빚세상경제 불로소득체제에서 가장 손쉬운 ‘불로소득이고 독점 사유자산 쌓기’였다.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는 창세기 히브리 족장이야기와 출애굽 해방과 구원사건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그런데 성서학자들의 문서가설에 따르면 요셉이야기는 엘로힘(E)문서로써 에브라임과 므낫세지파 중심의 북 왕국과 연결된다.
실제로 솔로몬왕국이 남북왕국으로 갈라섰을 때,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지파는 북 왕국의 핵심세력이었다. 북 왕국 여로브암1세는 에브라임 지파소속으로써 왕권을 거머쥐었다. 요셉 자신도 히브리노예들에게 ‘출애굽 때에 자기 뼈를 가지고 나가서 고향 땅에 묻어줄 것’을 요청했다. 히브리들은 요셉의 요청에 따라 북 왕국 땅 세겜에서 요셉의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르러 많은 성서학자들은 히브리 성서 안에서 엘로힘(E)문서의 독립성을 거부한다. 도리어 히브리 성서 속에서 엘로힘(E)문서의 본래 모습을 찾기보다는 엘로힘(E)문서에 대한 신명기학파의 재구성 또는 재편집 흔적을 찾는데 몰두한다.
이점에서 성서학자들은 꿈의 사람요셉이야기를 기원전 9백50년경 솔로몬왕국시대 작품으로 이해한다. 히브리 성서 속에서 요셉이야기는 처음부터 솔로몬왕국의 뜻과 의지에 따라 수집되었거나 편집되었다. 또한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져 덧붙여지고 재구성되어 자리를 잡았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성서학자들은 요셉이야기의 뿌리를 고대 이집트 지혜문학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가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의 외부인 성공신화’로써 이집트 지혜문학 속에 터를 잡았을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솔로몬왕국은 ‘이집트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솔로몬왕국은 ‘지식과 열정이 넘치고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수많은 외국인관료들’을 고용했다.
이렇듯이 성서학자들은 ‘솔로몬왕국이 소제국주의 통치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이집트 지혜문학 속에서 요셉이야기를 수집하고 새롭게 다듬었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무엇보다도 히브리 지파동맹 풀뿌리 농부들의 땅 소유권이 솔로몬왕국으로 몰수되면서 ‘자비로운 소작료를 선전선동 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필자도 ‘솔로몬왕국이 이집트 지혜문학에서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를 수집하고 새롭게 재구성함으로써 소제국주의 통치를 정당화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솔로몬왕국시대의 소제국주의 편집과 재구성의도를 쫓아 ‘꿈의 사람 요셉 읽기’에 맹목적으로 몰두한다.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를 자본주의 성공신화로 읽고 해석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요셉의 꿈, 요셉비전 학교’ 등 기독교회 청소년들에게 ‘빚세상경제 채무노예세상 이데올로기’를 세뇌한다. 21세기 맘몬․자본세상에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그리고 착취와 쌓음의 불로소득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선전선동 한다. 오롯이 기독교회 청소년들을 맘몬․자본세상 노예성공신화로 유혹하는 일에 거리낌 없이 본문읽기를 오용(誤用)하고 남용(濫用)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는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의 도구로써 ‘외부인 노예성공신화’에 불과하다. 도리어 본문읽기는 요셉이야기를 통하여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 완결의 음모와 술수들을 낱낱이 까발린다.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가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을 채무노예화 하는 모든 과정과 결말을 하나하나 파헤친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히브리 노예들의 출애굽 해방과 구원 대서사’를 위한 배경과 무대를 마련한다.
실제로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또는 여호와)의 나타나심과 ‘파라오와의 드라마틱한 대결’은 요셉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가 ‘외부인 노예성공신화 요셉이야기’속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요셉이야기 자체가 ‘히브리 노예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태동을 위한 배경이고 무대이기기 때문이다. 나아가 히브리 노예들이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 속에서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계시 받고 이해하며 깨닫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파라오 채무노예제국은 그 자체로써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광야 희년신앙훈련과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의 필요조건과 마땅함을 증언한다. 히브리들의 가나안 땅 노느매기와 정의와 평등세상 건설 등 히브리 성서가 증언하는 모든 해방과 구원사건들의 출발점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도 파라오 채무노예제국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과 초대교회의 예수부활신앙’ 등 기독교 핵심신앙에 맞서는 ‘반(反)신앙의 표상(表象)’이다.
파라오는 누구인가?
‘파라오’는 히브리 성서에서 자주 불리는 이름들 가운데 하나다. 파라오는 ‘통치하다’라는 뜻인데 실제 발음은 ‘파르오 פַּרְעֹה’이다. 고대 이집트제국 황제의 이름이다. 그러나 직접 대놓고 부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파라오라는 이름은 감히 직접 부를 수 없는 ‘이집트제국의 표상으로써 존귀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출애굽기 본문에서 고대 이집트제국 파라오의 위상은 ‘하나님’이다. 파라오는 절대 권력을 갖는 신정정치(神政政治)의 꼭지로써 영혼불멸 하는 하나님이었다. 또한 고대 이집트제국 안에서 다양한 신들을 섬기는 모든 사제들의 우두머리 대사제였다. 파라오의 이러한 절대위상(絶對位相)은 성서주변세계의 다른 모든 권력자들의 위상을 뛰어넘는 것으로써 아무도 넘볼 수 없었다.
한편으로 고대 이집트 땅의 모든 제사장들은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의 내부자들이다. 제사장들은 고대로부터 이집트제국의 고위관료이며 세력 있는 정치가들이었다. 제사장들은 파라오의 업적을 평가하고 비판하며 심지어는 파라오를 몰아내거나 살해하기도 했다. 또 한편 제사장들은 새로운 파라오를 세우거나 계승할 때에도 모두 함께 뜻과 힘을 모았다. 모든 제사장들이 파라오의 신성한 통치를 인정하고 숭배했다. 하나하나의 다양한 종교전통과 의식을 통하여 파라오를 보호하며 받들었다.
그렇다면, 고대 이집트제국에서 파라오의 이러한 절대위상의 밑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고대 이집트 땅의 ‘지정학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집트 땅은 고대 지중해세계의 다른 문명지역들과 달리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닫혀 있는 땅이었다. 고대 이집트 땅은 아프리카 동북부 끝자락에서 지중해와 맞닿아 있고 아프리카 본토 쪽으로는 사하라사막에 막혀 있었다. 유일한 출구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지역인데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역과는 지정학거리가 멀었다. 고대 이집트제국은 지정학으로 외부세력으로부터 침략전쟁 외에는 별다른 도전을 받지 않았다. 이와 비교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역의 권력자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대리인 또는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주변 세력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통하여 권력을 쟁취하고 누려야만 했다.
둘째는, 고대 이집트 땅의 지정학특징으로서의 ‘나일강의 존재’이다. 나일 강은 아프리카 적도지역 남쪽 고원지대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 북동부로 흘러들어 지중해와 만난다. ‘강’의 총길이는 6천6백50km이르는데 강물이 흐르는 언저리 땅 크기만 해도 3백34만9천9백㎢라고 한다. 아프리카 땅의 약 10분의 1정도가 나일강이 흐르는 언저리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나일강은 아프리카 적도지역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북동부지역을 흐르면서 매년 6월에서 7월까지 아프리카 상류지역의 홍수를 담아낸다. 그리고 8월에서 10월에 이르러는 하류지역에서 강 양편으로 16Km지역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범람을 일으킨다.
따라서 매년 정기적으로 나일강 하류지역은 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비옥한 토사가 쌓이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고대로부터 나일 강 하류지역은 농업 및 목축업이 발달했다. 이집트 땅 풀뿌리 사람들은 이러한 나일 강의 범람을 자신들의 삶의 밑바탕으로 여기고 숭배했다.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의 자연환경 속에서 수많은 자연신들을 만들어내고 섬겨왔다.
이렇듯이, 고대 이집트제국문명사 안에서 다양한 종교들이 생겨났다. 그 낱낱의 종교들의 헤게모니는 고대 이집트제국 사회․종교․정치․경제 독점 권력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절대 권력을 갖는 신정정치(神政政治)의 꼭지로써 ‘영원불멸 하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주장하는 파라오가 나타났다. 그 파라오가 나일 강 언저리 땅 모두를 정복하고 지역마다 다양했던 종교헤게모니를 통합했다.
이제 필자는 위와 같은 본문이해와 관점을 통하여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 본문들’을 자세히 읽고 풀이하려고 한다. 히브리 노예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의 출발지점’으로써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음모와 술수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들여다보려고 한다.
본문풀이
꿈의 사람 요셉,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완결(完結)하다.
파라오가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꿈꾸다.
어느 날 파라오가 그 땅의 모든 풀뿌리 사람들을 채무노예화 하려는 매우 모질고 사나운 꿈을 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은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 속으로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가져온다. 그리고 ‘꿈의 사람 요셉의 노예성공신화’를 펼쳐내어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아주 꼼꼼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파라오가 채무노예제국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어내기 위해 벌이는 ‘끔찍하고 사악한 음모와 술수들’을 하나하나 낱낱이 드러낸다.
그러나 물론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본문읽기와 해석은 본문의 신앙진실과는 사뭇 다르다. 오롯이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꿈의 사람 요셉의 성공신화’에 열광할 뿐이다. 21세기 성서독자들도 창세기의 ‘요셉과 그의 형제들 이야기 단락’에서 꿈의 사람 요셉을 찾아내어 열광한다. 그 열광은 본문일기에서 절정을 맞이한다. 이렇듯이 성서독자들은 본문을 읽고 풀이하는 과정에서 ‘꿈의 사람 요셉의 성공신화’를 찬양하고 부러워한다. 또한 자신들도 요셉처럼 21세기 맘몬․자본주의 성공신화를 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요셉이 내어놓는 ‘끔찍하고 사악한 음모와 술수들’을 낱낱이 폭로한다. 본문은 요셉과 파라오의 꿈이 만나고 그 꿈을 완결해가는 과정’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풀어 놓는다.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위해 요셉이 펼쳐내는 온갖 끔찍한 음모와 놀라운 술수들을 남김없이 드러내어 보여준다. 실제로 ‘꿈의 사람 요셉’은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을 통해서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만난다. 그리고 마침내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완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오롯이 ‘꿈의 사람 요셉의 성공신화’에만 열광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성서독자들의 본문읽기와 풀이에서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과 음모와 술수들’이 시나브로 은폐된다.
실례로 본문에서 요셉은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기 위해 그리고 그 땅을 위해’라는 조건을 내세워 칠년 풍년동안 그 땅의 모든 잉여곡식을 독점하여 쌓았다. 그러고도 실제로는, 흉년에 이르러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을 굶주리게 만든다. 그 땅의 흉년을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굶주림으로 옮겨놓는다. 그럼으로써 그 땅의 모든 풀뿌리 농부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워 채무노예로 삼는다. 그런 후에야 ‘자비로운 소작료’라는 이름으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의 ‘빚진 죄인 이데올로기’를 선동 한다.
꿈의 사람 요셉,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만나다.
본문은 꿈의 사람 요셉이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꿈을 만나서 그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한편의 드라마로 펼쳐낸다. 그런데 본문이야기 속 사건들이 일어나고 펼쳐지는 흐름이 너무도 꼼꼼하고 생생하다. 고대 이집트제국 파라오는 오매불망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을 채무노예화 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파라오의 노예제국 욕망은 파라오 지배체제 안에서조차 흔쾌한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다. 파라오 지배체제 안에 파라오의 노예제국 욕망에 동의하지 않는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세력은 고대 이집트문명세계의 다양한 신전종교체제에 뿌리를 내린 지식인그룹이었다. 본문은 이들을 ‘하르툼밈 חַרְטֻמִּים 박사들 또는 예언자들’이라고 표현한다. 두 번째 세력은 고대 이집트 문명세계 곳곳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신전 제사장그룹이었다.
실제로 성서주변 지중해 문명세계에서는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종교·정치․경제 지배체제가 터를 잡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세계에서도 나일 강을 따라 터를 잡은 수많은 종교엘리트들이 지역패권과 권력을 독차지했다.
그렇다면 왜, 파라오 지배체제의 박사들과 제사장들은 파라오의 노예제국 꿈에 흔쾌하게 동의하지 못했을까?
먼저 파라오의 노예제국 꿈이 매우 독단적이고 무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파라오의 노예제국 꿈이 기존의 파라오 지배체제를 위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이 지금까지 파라오를 높이 받들어온 이집제국 지배체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파라오 지배체제 내부자들의 권력과 이익배분 체계가 해체되고 모든 권력과 이익이 파라오 황실로 몰수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라오는 채무노예제국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파라오 지배체제 내부자들에게 자신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선포하고 설득한다. 그리고 동의와 연대와 참여를 요청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파라오는 지배체제 외부인 노예성공신화로써 ‘꿈의 사람 요셉’을 발굴한다. 파라오는 꿈의 사람 요셉을 중재자로 끌어들여 파라오 지배체제 안에서 자신의 채무노예제국 욕망을 타협하고 연대와 참여를 이끌어 낸다.
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본문은 파라오궁정 안에서 ‘끊임없는 논란과 다툼 그리고 타협’을 통해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여럿이 함께 벌이는 온갖 음모와 술수들을 하나하나 생생하고 꼼꼼하게 보여준다. 본문에서 파라오는 인류문명사에 흔치 않았던 ‘참으로 모질고 끔찍한 채무노예제국’을 욕망한다. 그리고 파라오는 자기욕망을 이루는 도구로써 파라오 지배체제 외부인 성공신화 ‘꿈의 사람 요셉’을 찾아낸다. 파라오는 요셉을 중재자로 끌어들여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꿈에 동의하지 않는 박사들과 관료들과 제사장들을 설득해 낸다.
이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꿈은 ‘파라오 지배체제 내부자들의 꿈’으로 확대되었다. 요셉을 비롯한 박사들과 제사장들은 파라오와 함께 채무노예제국 꿈을 꾸었다. 그들의 소통과 참여와 연대가 바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다. 이집트 땅 풀뿌리 사람들을 온통 채무노예화 하려는 엄청난 음모와 술수의 실체다. 파라오는 ‘파라오의 사람들과 꿈의 사람 요셉과 함께 온갖 음모와 술수들을 꾸미고 행동’함으로써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완결했다.
이와 관련하여 ‘꿈의 사람 요셉 이야기의 틀거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음모와 술수를 위해 짜 맞춰진다. 요셉이야기는 처음부터 본문사건들을 예측하고 거기에 짜 맞춘 것처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이어져 왔다. 맨 처음 요셉은 형들의 손에서 파라오 지배체제의 노예로 팔렸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위치에서 두 번씩이나 파라오 지배체제의 내부자 위치로 삶의 자리를 이동한다. 꿈의 사람 요셉의 성공이미지를 꾸미고 튼튼하게 하는 사건들이 잇달아 벌어진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는 고대 이집트 지혜문학 속에서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서사’를 이루는 핵심요소였을까?
솔로몬왕국은 소제국주의 다윗왕조를 두둔하기 위해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서사를 그대로 끌어다 썼을까? 아니면,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서사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서 ‘꿈의 사람 요셉 이야기’로 재구성했을까?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또렷하게 밝혀내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본문에서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는 파라오 채무노예제국을 완성하는 도구로써 핵심역할을 해낸다. 파라오 채무노예제국의 온갖 음모와 술수들을 하나로 얽어내는 핵심요소다. 왜냐하면,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야말로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욕망을 위한 아주 특별한 ‘외부인 노예성공신화’이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온갖 음모와 술수들을 짜내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오롯이 도맡아 해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셉은 파라오 지배체제 내부자세력 안으로 침투한다. 그리고 마침내 파라오의 채무노예세상 열망을 쫓아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을 온통 채무노예화 하는 위대한 과업을 완성한다. 인류종교․문명사 속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완성한다. 모든 이익과 권력이 파라오에게로 몰수되는 피라미드 빨대착취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완결한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일들일까?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 본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이루어가는 사건들마다에서 하나님을 불러낸다. 모든 사건 하나하나마다 ‘하나님의 뜻 또는 하나님의 일들’이라고 드러내어 밝힌다. 요셉은 파라오에게 ‘제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평안을 위하여 대답하실 것’이라고 설레발친다. 그럼으로써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본문 사건들마다에는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지시하심’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시는 것’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하나님이 파라오에게 ‘해야 할 일을 보여주신바 그 일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일들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거나, 개입하시거나, 명령하시는 내용들이 전혀 없다. 본문읽기에는 오롯이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이루기 위한 음모와 술수들’만이 꼼꼼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실례로 요셉은 일곱 해 풍년과 일곱 해 흉년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설레발친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지체 없이 행하려고 서두르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이집트 땅에서 살아온 풀뿌리 농부들의 삶의 경험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일강변의 풍년과 흉년은 늘 되풀이 되어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꼭 짚어서 ‘하나님의 뜻 또는 하나님이 결정하신 일’이라고 주장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
실제로 기후학자들은 ‘약 1만년 이전부터 고대 이집트 땅의 기후와 풍토가 자리를 잡았다’고 설명한다. 고대 이집트 땅에서는 나일 강의 범람에 따라 풍년과 흉년이 반복해서 벌어졌다. 나일 강 언저리 땅에서 풍년과 흉년이 반복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고대 이집트제국 파라오들마다 나일 강의 범람에 대비해 방조제를 새로 쌓거나 튼튼하게 고쳐서 풀뿌리 농부들을 보호해 왔다. 그 일들을 자기업적으로 자랑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파라오 지배체제의 박사들조차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본문은 이러한 갈등상황 속에서 파라오의 실망감을 아주 생생하고 절절하게 표현한다.
“내가 박사들에게 말했으나 아무도 나에게 풀어서 알려주는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오는 채무노예제국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집트제국을 온통 다 뒤져서 ‘외부인 노예성공신화로써 꿈의 사람 요셉’을 찾아낸다. 파라오는 외부인 노예성공신화로써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를 발판으로 내부자들의 동의와 타협을 이끌어 낸다.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꿈을 완성하기 위한 온갖 음모와 술수들을 짜내고 결단하며 행동하는 가운데 마땅한 결과들을 내어 놓는다.
참으로 꿈의 사람 요셉은 채무노예제국 건설에 목말라 하는 ‘파라오의 평안’을 위해서 오롯이 맡겨진 역할에만 몰두한다. 그 역할을 위해 ‘하나님의 뜻 또는 하나님의 계시’를 온갖 음모와 술수의 도구로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을 도구로 이용한 ‘요셉의 온갖 음모와 술수들’은 파라오 지배체제 내부자들 사이에서 아낌없는 찬사와 지지를 얻는다. 파라오 지배체제의 ‘제사장들과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마음을 하나같이 기쁘게 한다.
그렇다면 요셉은 무엇으로 파라오 지배체제의 모든 신하들의 마음조차 들뜨게 만들었을까? 요셉이 내어놓은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음모와 술수들’은 무엇이었을까?
본문읽기는 꿈의 사람 요셉이 내어놓은 모든 음모와 술수들을 꼼꼼하고 생생하게 나열한다. 참으로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요셉이 제안하는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음모와 술수들’은 매우 철저하고 냉정하며 엄격하다.
첫 번째, 이집트 온 땅 위에 ‘파라오만을 충직하게 떠받드는 총리’를 내세워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을 위한 모든 음모와 술수들의 방패막이로 삼는다.
두 번째, 이집트 온 땅 위에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꿈을 위한 온갖 음모와 술수들을 직접 실행할 감독자들 또는 군대지휘관들을 임명한다.
세 번째, ‘자비로운 오분의 일 세금’을 내세워 지금까지 이어온 ‘소작농 채무제도’를 개혁하고 거부감 없이 그 땅의 농부들로부터 잉여곡물을 모은다.
네 번째, 감독자들이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에게서 잉여곡물을 모으면서 파라오의 손(파라오의 권력)을 사용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그 땅 풀뿌리 농부들에게 파라오의 권력을 옳고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 때 본문은 ‘타하트 야드 파르오 תַחַת יַד־פַרְעׄה 파라오의 손아래’라는 히브리어 문구를 사용한다. 이 문구를 문맥에 맞게 번역하면 ‘파라오의 권력으로’인데 감독자들이 ‘파라오의 손에 있는 권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로써 꿈의 사람 요셉은 파라오 지배체제의 외부인 노예성공신화 주인공으로서 파라오 지배체제 내부자가 되었다. 요셉은 파라오 지배체제 핵심 내부자세력인 제사장그룹 안에 삶의 터를 잡았다. 파라오 지배체제의 외부인 노예성공신화로써 꿈의 사람 요셉은 ‘온 제사장 포티 페라아’의 사위가 되었다. 파라오 지배체제 안에서 제사장 가족으로 신분세탁을 했다. 참으로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는 인류종교․문명사 속에서 ‘모든 종교들과 제국주의 지배체제가 언제나 한통속 이었다’는 역사진실을 증언한다. 실제로 파라오는 요셉에게 ‘차페나트 파아네아흐 צָֽפְנַת פַּעְנֵח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다’라는 종교엘리트 이름을 주었다. 또한 요셉을 이집트 온 땅 위에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음모와 술수들을 총감독하는 총리’로 세웠다. 파라오는 요셉에게 고운 모시옷을 입히고 목에 금목걸이를 걸어주며 자기 손에서 인장반지를 빼내어 요셉의 손에 끼웠다. 또한 모세를 자기 버금마차에 태웠다. 그러자 모든 이집트 풀뿌리 사람들이 ‘아브레크 אַבְרֵךְ 쉬이 물렀거라’라고 외쳤다.
그러나 파라오는 요셉에게 마치 하나님처럼 말한다.
“나는 파라오다”
파라오는 요셉 앞에서 오롯이 하나님처럼 행세한다.
꿈의 사람 요셉, 이런 꼼수쟁이를 다시 찾아볼 수 있을까?
본문읽기에서 꿈의 사람 요셉은 누구도 의심할 필요가 없을 만큼 엄하고 철저하게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욕망을 위해 일한다. 파라오 채무노예제국을 위해 온갖 음모와 술수들을 짜내고 직접 행동한다. 요셉은 이집트 땅의 일곱 해 풍년의 여유 속에서 ‘오분의 일 세금계획’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파라오의 손(파라오의 권력)을 내세워 이집트 땅에서 생산된 ‘콜-오켈 쉐바 솨님 כָל־אׄכֶל שֶׁבַע שָׁנִים 일곱 해 풍년의 모든 잉여곡물’을 긁어모았다. 요셉은 그렇게 긁어모은 곡물들이 너무 많아서 셈하는 것조차 그만두었다.
이때 요셉은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참으로 놀라운 꼼수를 부린다. 요셉은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모든 잉여곡물을 긁어모아 ‘그 땅 그 도시 안에’ 저장했다. 요셉은 그 땅 풀뿌리 농부들에게서 긁어모은 곡물을 파라오의 곳간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오히려 풀뿌리 농부들이 농사짓고 사는 그 땅 곳곳에서 그들의 도시들 안에 잉여곡물을 저장했다. 그 도시의 풀뿌리 농부들에게서 그 도시에 잇닿아 있는 밭들의 잉여곡물을 몰수해서 그 도시 한가운데에 저장했다. 그 도시에 사는 풀뿌리 농부들의 눈앞에 보란 듯이 수많은 곡물들을 쌓아놓았다. 요셉은 칠년 풍년동안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손에서 모든 잉여곡물을 모았다. 파라오의 손을 앞세워 그 땅 풀뿌리 농부들로부터 칠년 풍년의 모든 잉여곡물을 빼앗았다. 그러면서도 ‘칠년 흉년을 대비하기 위해 또한 그 땅이 황폐해지 않도록 하기위해’라는 조건을 내세워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눈길과 마음을 훔쳤다.
요셉은 온갖 꼼수 가운데 최고의 꼼수를 부림으로써 속절없이 잉여농산물을 빼앗기는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은 파라오의 권력 때문에 자신들의 모든 잉여곡물을 다 빼앗겼다. 그렇지만 그들의 도시 한가운데 한없이 쌓여진 곡물 더미를 보면서 언제가 닥칠 흉년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참으로 꿈의 사람 요셉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꼼수쟁이’였다.
이렇듯이 본문에서 꿈의 사람 요셉과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욕망이 만나서 찰떡궁합처럼 짝을 이루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일강 범람으로 인한 풍년과 흉년을 기회로 삼아 파라오 채무노예제국을 위한 온갖 음모와 술수들을 꽃피울 수 있었다. 참으로 요셉의 험난한 인생경험과 거기로부터 터득한 꾀와 지식들은 얼마든지 ‘루아흐 엘로힘 רוּחַ אֱלׄהִים 하나님의 영’처럼 행사될 수 있었다.
꿈의 사람 요셉,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완결하다.
이집트제국 도시들마다에 한없이 쌓여진 곡물더미들,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은 바라만 보아도 배불렀을 것이다. 흉년의 모든 근심걱정을 덜었을 것이다. 그러나 풀뿌리 농부들의 모든 기대와 바람은 실제로 흉년을 맞아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실제로 흉년이 시작되자마자 요셉이 풀뿌리 농부들에게 돈을 받고 곡물을 되팔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칠년 대풍년 때에 꿈의 사람 요셉은 흉년을 대비한다고 설레발을 쳤다.
그러면서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잉여곡물을 몽땅 쓸어가지 않았는가? 지금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눈앞에 쌓여있는 곡물더미는 흉년을 대비하여 쌓아놓은 자신들의 잉여곡물 아닌가?
사실, 고대 이집트 땅에서 나일강 범람 때문에 반복되는 풍년과 흉년은 그 땅 풀뿌리 농부들에게 특별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제국 파라오들마다 흉년을 대비해 나일 강 언저리 땅 곳곳에 곡물창고들을 지어 왔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제국 봉건군주들이 다스리는 가나안 땅 여기저기에도 파라오의 곡물창고들이 세워졌다. 그러므로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은 요셉의 곡물판매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흉년 첫 해에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은 자신들의 도시 안에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양식’이 있는 것을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요셉에게서 양식을 샀다. 요셉은 ‘양식을 사려는 풀뿌리 농부들에게 풍년 잉여곡물들을 팔아’ 그들의 모든 돈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그 돈을 파라오 황실에 바쳤다. 본문읽기에서 꿈의 사람 요셉은 흉년을 기회로 삼아 이집트 온 땅으로 굶주림을 확대하고 깊어지게 했다. 이집트 땅의 흉년은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삶의 마당에서 굶주림으로 나타나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요셉은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굶주림을 기회로 삼아 이집트제국 곳곳으로 가난을 퍼트렸다.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가난이 점점 더 커지고 넓어지며 깊어지게 했다. 그러나 오롯이 파라오의 황실만은 점점 더 많은 돈이 쌓였다. 파라오 황실만이 홀로 이집트제국의 모든 부를 독점하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해였다. 돈이 다 떨어진 그 땅 풀뿌리농부들이 요셉에게 몰려와서 항의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오.
우리가 돈이 없어서 눈앞에 양식을 두고 굶어 죽는 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소.
도대체 왜, 우리가 당신 앞에서 굶어 죽어야한단 말이오?”
위 히브리어 문장들의 문맥 안에는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불만과 분노가 넘쳐난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떠들썩한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한도 끝도 없는 곡물더미의 실체가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의 일곱 해 풍년 잉여곡물이었기 때문이다. 일곱 해 풍년동안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이 흘린 피와 땀이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은 요셉에게 ‘이제 흉년이 왔으니 일곱 해 풍년의 잉여곡물을 내 놓으라’고 요구했다. 떼를 지어 몰려 나와 항의하며 농성했다.
그러나 꿈의 사람 요셉의 태도는 흔들림 없이 사납고 거칠었다. 요셉은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곡물더미들을 모두 한손에 틀어쥐었다.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주인행세를 했다. 실제로 요셉 앞에서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애처로운 항의와 시위 따위는 보잘 것 없었다. 요셉은 파라오의 손(파라오의 권력)을 높이 치켜들었다. 파라오 지배체제의 무한권력과 폭력을 등에 업은 요셉이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너희 가축들을 내놓아라!”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의 항의와 시위에 맞서는 요셉의 으름장은 강하고 사나우며 집요했다. 요셉은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대리해서 모든 음모와 술수들의 꼭대기 위에 홀로 섰다. 아마도 요셉이나 파라오 지배체제는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폭력의 힘이 ‘얼마나 큰지’ 속속들이 헤아리고 있었을 것이다. 파라오 지배체제의 무한권력과 폭력에 비하면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항의와 소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파라오 지배체제는 오랜 통치경험 통하여 풀뿌리 농부들의 세력에 대하여 훤히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항의와 소란 따위야말로 ‘아주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늘 그래왔듯이 파라오 지배체제의 무한폭력과 권력 앞에서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저항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렇게 한 번에 무너진 풀뿌리 농부들의 항의와 시위는 이후로 본문읽기에서 단 한 차례도 되살아나지 못했다. 도리어 이집트 땅 모든 풀뿌리 농부들은 앞 다투어 파라오 지배체제 무한권력 앞에서 몸을 굽혔다. 파라오 지배체제가 시키고 이끄는 대로 자신과 가족들의 모든 삶을 내맡겼다. 이제 점점 더 커지고 깊어지는 흉년을 맞아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은 언감생심 꿈의 사람 요셉의 부당한 일처리에 저항하지 못했다.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애처롭고 처절한 하소연만 깊어졌다.
“우리는 주께로부터 숨기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돈이든, 가축이든, 짐승들이든 그것들을 다 주께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쇠락하고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이제는 우리 몸뚱이와 우리 땅 뿐입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우리자신과 우리의 땅과 더불어 당신 눈앞에서 죽게 되었는지?
당신이 먹을거리로 우리 몸뚱이와 우리의 땅을 사십시오.
우리와 우리의 땅도 함께 파라오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은 점점 더 커지고 깊어지는 굶주림 앞에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찍소리조차도 못 내고 오롯이 백기 투항했다.
물론, 인류문명사 속에서는 비록 뜻이 곧고 굳세지 못하더라도 지배체제를 향한 저항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풀뿌리 농투성이들은 보잘 것 없는 세력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생의 저항’을 벌여왔다.
그러나 이제 본문읽기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생의 저항이 무너졌다. 속절없이 ‘그 땅과 풀뿌리 사람들’이 다함께 파라오의 채무노예로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에게 씨앗을 주시오.
그렇다고 해도 그 땅의 가난하고 힘없는 풀뿌리 농부들이 끝없이 무너지기만 할까? 넘어지고 엎어지기만 할까?
다시 한 번 더 힘을 내어,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이 요셉에게 자신들의 마땅한 요구들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당신이 씨앗을 주십시오.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지 않아야만 ‘땅도 황무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위 히브리어 문장의 문맥 안에 흐르는 속뜻은 오롯이 ‘땅’에만 기대어 살아온 농투성이들의 속절없는 ‘생명저항 의지’다.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은 수많은 세월동안 그 땅에 기대어, 그 땅을 가꾸고, 그 땅을 믿고, 그 땅을 의지하여 살아왔다.
“우리에게 씨앗을 주시오.”
이 요청은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끝판 생의 자존심이며 ‘밑바탕 삶의 의지’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꿈의 사람 요셉은 너무도 놀랍고, 두렵고, 참혹하게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끝판 생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들의 밑바탕 삶의 의지와 숨통을 끊었다.
“요셉이 이집트제국 경계 이 끝으로부터 저 끝으로까지 도시들로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을 옮겼다.”
인류종교․문명사 속에서 꿈의 사람 요셉처럼 잔인하고 가혹하게 일처리를 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본문읽기에서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은 자기 땅을 빼앗기고 온 가족이 함께 파라오의 채무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땅으로부터 뿌리 뽑혀 쫓겨나야만 했다. 이제는 속절없이 떠돌이 농노신세로 떨어졌다.
이집트제국 경계 이 끝으로부터 저 끝으로 까지
모르면 몰라도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가 온통 ‘생난리를 쳐야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이 그 땅에서 뿌리 뽑혀 자기 삶을 해체 당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 땅에서 뿌리 뽑혀 쫓겨난 농투성이들에게 남은 것은 ‘떠돌이 농노인생’뿐이다. 실제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에서 꿈의 사람 요셉이 끝판까지 숨겨놓았다가 내어놓은 음모와 술수가 바로 이것이다. 오롯이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을 떠돌이 농노로 만드는 것’이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또렷하게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의 끝판 ‘생의 저항의지와 숨통을 끊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을 ‘노동하는 노예인간’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인류종교․문명사 속에서 이토록 참혹하게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떠돌이 농노집단은 없었다. 성서 속에서 사례를 찾는다면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한 후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시리아 땅으로 강제이주 당한 일’정도다. 물론 한국의 성서독자들이라면 당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는 한민족 역사상황도 있다. 구소련 스탈린 지배체제에서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참혹한 역사상황’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21세기 성서독자들은 요셉이야기를 통해서 고대 이집트문명의 ‘피라미드 또는 스핑크스 불가사의(不可思議)’를 너끈히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땅으로부터 뿌리 뽑혀 나온 떠돌이 농노들은 언제 어디서든 ‘파라오의 욕망에 따라 동원되는 노동기계’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원전 2천6백 년대 이집트제국 파라오 쿠푸는 매일 2만5천명을 동원해서 20여 년 동안 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 두말할 필요도 없이 본문읽기에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은 인류종교․문명사 속에서 가장 참혹한 노예세상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요셉은 온전히 제사장들의 땅만큼은 사지 않았다.
또 한편 본문읽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의 감춰진 진실하나를 더 까발린다.
“그러나 요셉은 온전히 제사장들의 땅만큼은 사지 않았다.”
파라오 노예제국 제사장들은 파라오 지배체제 핵심내부자로서 종교기득권 세력이었다. 제사장들은 파라오와 더불어 채무노예제국 불로소득 가운데서 자기 몫을 챙겼다. 제사장들은 새롭게 세워진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에서도 고위관료였고 특권세력이었다. 제사장들은 파라오의 곳간으로부터 그들에게 배분되는 벼슬아치의 몫으로 먹고 살았다. 또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에서 자신들이 소유한 땅을 영구사유화 하는 권리를 누렸다.
제사장들은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의 특권세력으로써 요셉의 모든 위임통치에서 벗어나 한껏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제사장들은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빚진 죄인, 사회․종교․정치․경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퍼뜨렸다. 그럼으로써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삶의 마당에 ‘빚진 죄인, 사회․종교․정치․경제 집단신념체계’를 크고 깊게 새겨 넣어 선전선동 했다. 그렇게,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을 세뇌(洗腦)했다. 나아가 ‘죄와 심판과 처벌’이라는 종교교리를 통하여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의 삶을 윽박질렀다. ‘죄와 심판과 처벌’이라는 종교공포 또는 두려움을 퍼트려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삶을 옥죄고 기를 펴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롯이 제사장들은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튼튼하게 하고 그 안에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 몰두하였다.
자비로운 그러나 허울뿐인 ‘파라오 땅의 오분의 일 소작료’
꿈의 사람 요셉은 파라오 지배체제 외부인 노예성공신화 당사자로서 제사장그룹에 뿌리를 내렸다. 요셉은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 제사장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이집트 땅 모든 풀뿌리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했다.
“보라. 오늘 내가 파라오를 위해 너희 몸뚱어리와 너희 땅을 샀다.
여기 보라. 너희에게(또는 너희를 위한) 씨앗이 있다.
너희는 파라오의 땅에 씨앗을 뿌려라.
그리고 너희는 추수 때마다 오 분의 일을 파라오께 바쳐라.
나머지 넷은 너희와 파라오 밭의 씨앗을 위하여 너희 손에 있을 것이다.
너희와 너희 집안에 있는 식구들과 너희 어린아이들을 위한 먹을거리로
너희 손에 있을 것이다.”
이로써 꿈의 사람 요셉은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 속에서 떠돌이 농노로 떨어져 내린 농부들로부터 ‘이렇게’ 맹세를 받아냈다.
“당신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눈에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파라오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땅 떠돌이 농노들의 맹세를 밑바탕삼아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완결한다. 그러나 ‘파라오 땅의 오분의 일 소작료’야말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의 마지막 몽니와 같다.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의 떠돌이 농노들에게는 그저 ‘허울뿐인 자비로운 소작료’였다.
왜냐하면 요셉이 파라오의 땅에 뿌려할 씨앗을 파라오의 땅에 매여 사는 소작농노들에게 몽땅 떠넘겼기 때문이다. 소작농노들은 온 식구가 함께 먹어야할 곡물 가운데 상당량을 파라오의 땅에 뿌릴 씨앗으로 따로 떼놓아야만 했다. 파라오의 땅에 뿌릴 씨앗 때문에 소작농노들에게 딸린 온 식구가 매일매일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본문에서 파라오 땅의 오분의 일 소작료야말로 ‘요셉이 파놓은 크고 깊은 굶주림의 함정’이다. 파라오 땅의 소작농노들을 길들이기 위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의 올무다. 왜냐하면, 이집트 땅 풀뿌리 농부들은 하나같이 ‘흉년을 굶주림으로 만드는 요셉의 음모와 술수’에 걸려들어 파라오 땅의 소작농노로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대 농경사회 혁명은 오랜 세월에 걸쳐 몇몇 곡물씨앗을 농사짓기에 알맞도록 길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농사짓기 기술은 오랜 세월동안 원시 그 자체였다. 수렵 채취시대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밭에 골을 타거나 두둑을 짓지도 않았고 묘판을 만들어 새싹을 키우는 기술도 없었다. 파라오의 소작농노들은 파라오의 밭에 씨앗을 흩뿌리고 나서 가축을 이용해 밭을 갈아엎어 씨앗을 덮었다. 나머지는 오롯이 하늘바라기 농사였다. 그러다 보니 21세기 농사짓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씨앗이 필요했다. 이렇듯이 씨 뿌릴 때에 이르러 파라오의 땅에 매여 살아가는 소작농노들의 손에 씨앗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 이러한 고대 농경상황 속에서 소작농 채무제도가 생겼다. 소작농들은 씨 뿌릴 때에 이르러 땅주인으로부터 주인의 밭에 뿌려야할 씨앗을 빌려서 씨를 뿌렸다. 그리고 수확할 때에 이르러 수확물의 3분의 1일을 주인에게 되갚았다. 이렇듯이 예부터 ‘소작농 채무제도’는 성서주변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문명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아마도,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의 소작농노들은 씨앗 뿌리기를 끝내고도 마냥 편히 쉴 수 없었을 것이다. 파라오 땅의 소작농노들은 이집트 나일강 충적토에 거미줄처럼 얽혀진 농수로를 보수해야만 했다. 또한 새로운 농수로를 파는 집단노역에 강제동원 되었다. 아마도 본문상황 속에서 소작농노들은 파라오를 위한 온갖 건설현장으로 쉴 틈도 없이 강제동원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강제노역에 관한 이야기들은 출애굽기 다른 본문들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히브리 노예들의 ‘희년신앙 행동 대서사의 태동’을 위한 무대를 펼치다.
파라오의 채무노예제국 꿈 본문들은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를 통해서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완결한다. 요셉은 파라오 지배체제의 폭력과 권력을 앞세워 그 땅 풀뿌리 농부들에게서 풍년의 모든 잉여곡물을 빼앗았다. 그리고 흉년을 맞아 그 땅 풀뿌리 농부들을 굶주리게 만들고 그들에게 풍년 잉여곡물을 되팔았다. 나일강의 범람 때문에 되풀이 되는 풍년과 흉년을 기회로 삼아 ‘그 땅 모든 풀뿌리 사람들이 굶주리도록 함정’을 팠다. 그 굶주림의 함정을 통해서 이집트 땅 모든 풀뿌리 농부들을 채무노예화 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완결했다. 오롯이 파라오에게로 모든 이익이 몰수되는 피라미드 빨대착취구조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를 완성했다.
이제, 요셉과 더불어 파라오체제의 제사장들과 고위관료들 모두가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지배체제 내부자들’이다.
이렇듯이, 본문읽기는 꿈의 사람 요셉이야기를 통해서 히브리 노예들의 출애굽 해방과 구원사건의 배경과 무대를 펼쳐낸다. 무엇보다도 본문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의 나타나심’을 준비한다. 왜냐하면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의 나타나심과 출애굽 해방과 구원사건’이야말로 히브리 성서의 핵심신앙 사건이기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파라오 노예제국로부터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히브리들의 하나님이시다.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는 인류종교․문명사에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세상의 하나님’이시다. 이제 언감생심 파라오 채무노예제국 히브리 노예들도 자기 하나님을 찾고 깨닫고 신앙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의 출애굽 해방과 구원사건’이야말로 히브리 성서가 21세기 성서독자들에게 주는 ‘최고의 신앙선물’이다. 왜냐하면 파라오 채무노예제국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 노예들의 ‘고난과 절망의 삶’을 통해서 야훼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세상’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복음서에서 예수가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를 밑바탕 삼아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펼쳐 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예수는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으로 완벽하게 재구성’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자기 삶과 행동으로 펼쳐내는 일’에 자기인생과 목숨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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