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구약성서

희년신앙의 맥 : 야훼의 거룩한 전쟁, 약탈자들과 싸우시는 야훼 하나님

희년행동 2022. 11. 13. 20:18

희년신앙의 맥 : 야훼의 거룩한 전쟁, 약탈자들과 싸우시는 야훼 하나님

출 17:8-16

 

 

읽기

 

그 무렵 아말렉이 몰려와 르비딤에서 이스라엘과 싸웠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했다.

“우리를 위하여 장정들을 뽑아라.

그리고 나가서 아멜렉에 맞서 싸워라.

내일, 나는 그 산언덕 꼭대기에 서리라.

내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서.“

여호수아는 아멜렉에 대하여(맞서) 싸우려고 모세가 그에게 지시한 것을 따라 행동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훌은 산언덕 꼭대기로 올라갔다.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올렸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가 그의 손을 내릴 때에는 아멜렉이 이겼다. 그렇게 모세의 양손이 무거워질 때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밑에 놓고 모세가 그 돌 위에 앉게 했다. 그런 후에 아론과 훌이 한사람은 이쪽으로부터 또 한사람은 저쪽으로부터 모세의 두 팔들을 붙들었다. 그래서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굳게 버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멜렉과 그 군대(백성)를 쳐부수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했다.

“너는 이 전쟁을 기념하여 그 책에 기록하라! 또한 여호수아의 귀에 들려 두어라! 참으로(왜냐하면) 내가 해 아래로부터 아멜렉의 기억을 깨끗이 지우리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야훼 닛시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모세가 말했다.

“야훼의 보좌를 향하여 손을 들어 맹세하리라! 야훼의 전쟁이 대대로 아멜렉에 있을 것이다. 야훼께서 대대로 아멜렉과 싸울 것이다.”

 

낱말풀이

 

* 체 히라헴 바아말레크 ְצֵא הִלָּחֵם בַּעֲמָלֵק 나가서 아멜렉에 맞서 싸워라

* 아노키 니차브 알-로쉬 하기브아 אָנֹכִי נִצָּב עַל־רֹאשׁ הַגִּבְעָה 나는 그 산언덕 꼭대기에 서리라

* 마타 하엘로힘 베야디 מַטֵּה הָאֱלֹהִים בְּיָדִֽי 내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서

* 키-마호 에메헤 כִּֽי־מָחֹה אֶמְחֶה 깨끗이 지우리라

* 예흐바 닛시 יְהוָה ׀ נִסִּֽי 야훼 깃발. 막대기에 헝겊을 매단 정도의 표식

* 밀하마 라예흐바 바아멜렉크 미도르 도르 לְחָמָה לַיהוָה בַּֽעֲמָלֵק מִדֹּר דֹּֽר 야훼께서 대대로 아멜렉과 싸울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전쟁과 폭력의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1세기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에서 어떤 하나님의 이미지를 발견할까? 많은 사람들이 구약성서에서 사랑의 하나님, 해방과 구원의 하나님, 정의와 평등의 하나님,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 등 좋은 이미지들을 찾으려고 한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다양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찾아내어 저마다의 욕망들을 투사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성서에는 참으로 다양할 뿐만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하나님의 여러 이미지들이 나타난다. 아마도 21세기 기독교인들이 성서에서 발견하는 긍정적인 하나님의 이미지에는 오래전 신앙인들의 선한양심과 신앙의지가 투사되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성서독자들에게 구약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은 너무도 많은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전쟁과 폭력의 신’이라는 이미지다. 실제로, 구약성서는 전쟁과 폭력을 드러내는 본문을 600개 이상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100여개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나아가 하나님이 스스로 폭력과 죽임의 처벌자로 등장하는 구절이 1,000개가 넘는다.

실례로,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을 위해 여러 부족들을 살던 땅에서 쫓아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한다. 또한 공공연히 히브리 해방노예들에게도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민족들을 데려와서 히브리 해방노예들을 아주 죽여 없애버리겠다고 협박한다. 한마디로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인 전쟁신의 모습 그대로다.

이렇듯이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를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인 전쟁 신’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21세기 성서독자들 뿐만은 아니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전쟁과 폭력의 하나님 이미지는 초대기독교회 열광적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토론되었던 신앙주제였다. 특별히 초대기독교회의 영지주의자 들, 마르키온주의자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인 전쟁 신으로서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았다.

그러나 21세기 기독교신앙인으로서 야훼 하나님을 전쟁과 폭력의 신으로 독해하는 것에 휩쓸린다면 그 또한 철저한 문자주의자 일뿐이다. 성서는 어느 한날 갑자기 하늘에서 어떤 한사람 종교지도자에게 독단으로 주어진 계시가 아니다. 성서는 오랜 인류종교문화사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이해하고 발전시켜온 신앙고백의 산물이다. 따라서 성서는 시대마다의 사회․종교․정치․문화역사와 더불어 개인 삶의 상황을 담고 있다. 성서의 하나님의 이미지에는 여러 시대를 거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상황에서 제기는 ‘두려움, 희망, 욕구’ 등이 투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21세기 성서독자들은 성서를 시대마다의 역사와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맥락에서 비유처럼 읽을 필요가 있다. 나아가 21세기 성서독자들의 시대와 삶의 상황에서 성서를 번역하고 이해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21세기 기독교회신앙인들 또는 성서독자들은 성서본문 안에서 우리시대에 맞는 신앙의미와 신앙증언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의 투쟁으로써 ‘야훼의 전쟁, 또는 거룩한 전쟁’의 실체와 신앙의미를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약탈전쟁을 멈춰라, 야훼하나님은 대대로 약탈자들과 투쟁 하신다’라는 것이다.

 

왜, 무엇을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하는가?

 

성서는 수많은 전쟁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다. 성서학자들은 성서에 기록된 그 수많은 전쟁들을 ‘야훼의 전쟁 또는 거룩한 전쟁’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왜, 무엇을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하는가?

첫 번째, 이집트 파라오 노예제국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전쟁을 ‘야훼의 전쟁 또는 거룩한 전쟁’이라고 한다.

두 번째, 파라오 노예세상에서 해방된 히브리들의 야훼신앙․희년신앙 광야훈련여정에서 또한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정의와 평등 공동체세상을 이루기 위해 주변 약탈자들과 벌이는 모든 전쟁을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왜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는 신앙고백’을 구약성서 곳곳에 남겨놓아야만 했을까?

그것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유구한 신앙공동체역사 안에서 수도 없이 많은 약탈을 당해 왔기 때문이다. 실례로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옛 조상들은 자기 땅이 없어 떠도는 반유목민이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주변의 약탈자들이나 토착봉건군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기고 쫓겨나야만 했다.

아브라함의 인생여정을 살펴보자. 창세기 12:10에서 아브라함은 이집트 왕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빼앗겼다가 되찾는다. 창세기 14장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 시날왕과 엘람왕이 사해주변에서 소돔과 고모라 등을 약탈할 때 조카 롯이 잡혀간다. 창세기 20:2에서 아브라함은 또다시 토착봉건군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긴다.

이삭의 인생여정을 살펴보자.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은 토착봉건군주 아비멜렉에게 다섯 번이나 우물을 빼앗긴다.

야곱의 인생여정마저 살펴보자. 창세기 34장에서 야곱의 딸 디나는 세겜의 토착봉건군주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야곱의 가족은 벧엘로 도망쳐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의 온 식구가 이집트 파라오 노예제국으로 흘러들어가 이방인 노예로서 히브리가 되었다.

성서바깥 고대 문헌들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 땅에서 30개 왕조들이 일어서고 무너졌다고 한다. 그렇게 왕조가 바뀔 때마다 수많은 이방인 용병들이 이집트 파라오 노예제국으로 흘러들어왔다. 나아가 고대 이집트 땅에서 왕조가 안정되었을 때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까지 제국주의 약탈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이 히브리 노예들의 경험 속에서 모든 전쟁이란 재물과 노예들을 얻기 위한 약탈 전쟁이었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 파라오 노예제국에는 야곱의 식구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약탈노예들과 전쟁노예들 그리고 이방인 용병노예들이 존재했다. 구약성서는 이들을 싸잡아서 히브리(노예)라고 기록한다. 이들은 아무런 이해타산도 없이 제국주의 약탈전쟁에 말려들거나 용병으로서 화살바지 노릇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을 자처하시는 야훼가 나타났다. 이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 노예들을 파라오의 손에서 해방하시고 구원하셨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인류종교․문화사에서 유래가 없는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의 해방과 구원전쟁을 체험하게 되었다.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이 체험을 통하여 ‘야훼의 거룩한 전쟁’을 신앙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성서시대 제국주의 약탈전쟁의 희생자인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전쟁이 바로 거룩한 전쟁’이다.

 

이렇듯이 출애굽기 14-15장은 온갖 약탈전쟁의 희생자이었던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는 ‘야훼의 거룩한 전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바로 해방과 구원의 야훼 하나님과 파라오 노예세상 군대와의 홍해전쟁이다. 이 전쟁은 오롯이 야훼만의 전쟁이었다. 히브리 노예들은 그 전쟁의 수혜자이며 증언자이었을 뿐이다. 창세기 15장 모세와 미리암의 찬양시는 이 전쟁의 실체와 의미를 자세하게 묘사한다. 물론 이 찬양시들은 문자적으로만 그 진실을 알 수 없는 비유이다. 히브리 노예들의 역사적이 실체적인 경험이며 신앙고백이다.

야훼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의 또 다른 실체는 본문의 아말렉과의 전쟁이다. 본문에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세상을 지키고 확장하며 누리기 위해 야훼와 히브리들과 연합전선을 결성한다.

 

그렇다면 아멜렉은 어떤 무리이었기에 히브리 해방노예들과 전쟁을 벌였을까?

 

아멜렉은 유다 남부 네게브지역에 거주하는 여러 유목부족들을 싸잡아 일컫는 용어다. 이들의 주요한 생존방식은 약탈 전쟁이었다. 아멜렉은 평소 여러 부족으로 흩어져 살지만 주변의 떠돌이 부족들을 습격하고 약탈할 때는 나름대로 연합체를 이루곤 했다. 그러다가 때론 여러 부족이 한꺼번에 연합해서 주변의 제법 큰 민족을 공격하고 약탈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제 지금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을 경험한 히브리 해방노예들에게 떼강도 아말렉이야말로 가장 큰 위협이었다. 한마디로 아멜렉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 훼방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오합지졸이었다. 쓸 만한 전쟁무기도 없이 그저 맨손이었고 전쟁경험도 없는 무지렁이들이었다. 하지만 아멜렉은 날이면 날마다 약탈 전쟁이 손에 익은 떼강도들 이었다. 한마디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야훼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속수무책 아말렉에게 약탈당하고 죽임당할 수밖에 없었다.

구약성서 곳곳에는 이러한 떼강도들의 약탈전쟁에 맞서는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전쟁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본문은 아멜렉의 약탈 전쟁에서 승리를 기록하고 있지만 신명기 25:17-19에서는 히브리 해방노예들의 참패를 기록하고 있다. 신명기에서는 힘없고 가난한사람들에 대한 규정들을 나열한 뒤에 아말렉의 약탈전쟁을 기록한다. 사사기 6장 기드온의 전쟁에서는 미디안과 아말렉 연합군이 참패를 당한다. 사무엘상 15장 사울왕의 전쟁에서 핵심내용도 아멜렉의 약탈 전쟁이다. 사무엘상 30장에서 아멜렉은 시글락에 있었던 다윗의 캠프를 습격하기도 했다. 물론, 다윗도 시글락에 캠프세우고 주변에 거주하는 소수부족들을 약탈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렇듯이, 인류문명사 안에서 모든 크고 작은 전쟁들은 재물과 노예들을 쟁취하려는 약탈 전쟁이었다. 구약성서 시대에는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헬라제국’ 등 큰 규모의 제국주의 약탈 전쟁들이 발생했다. 예수시대에 이르러서 로마제국의 약탈전쟁은 그야말로 공포와 전율이었다.

성서바깥에서도 ‘아시아의 징기스칸, 오스만터키 등 제국주의 약탈 전쟁’이 끝이지 않았다. 20세기 초반부에 벌어진 1차 2차 세계대전은 지구촌 약탈전쟁 역사의 큰 획을 그었다. 이후 21세기까지 한국전쟁, 월남전쟁, 이라크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서 지구촌 제국 미국은 전쟁당사자이거나 주요이해관계자였다. 한마디로 지구촌 제국 미국의 약탈전쟁 이미지는 옛날 로마제국과 마찬가지로 ‘공포와 전율’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야훼의 거룩한 전쟁’ 신앙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참으로 놀랍고 잔인하게도 ‘진멸하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진멸하라’하라는 히브리어는 신앙용어이다. 히브리어 헤렘 חרם 은 사역형동사에서 파생 되었데 ‘진멸하도록 바쳐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문에서 아멜렉은 힘없는 소수부족들을 약탈해서 부와 세력을 키운다. 이때 약탈이란 사람이든 가축이든 물건이든 필요와 쓸모가 있는 것들은 남기고 나머지는 말살하는 것이다. 이제 본문에서 아멜렉의 약탈은 히브리 해방노예들을 향했고 아멜렉은 야훼 하나님을 화나게 했다.

따라서 ‘헤렘’이라는 히브리어를 야훼신앙용어로 해석한다면 ‘전쟁을 통하여 약탈하지 말라’는 뜻이다. ‘진멸하라’는 야훼의 명령은 모든 전쟁의 전리품이 야훼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써 사사로이 약탈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것이다. 곧 ‘진멸하라’는 신앙용어는 약탈전쟁을 금지하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러므로 21세기 성서독자들에게도 구약성서 ‘진멸하라’는 의미는 ‘부와 세력을 키우려고 약탈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기독교 국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무자비한 약탈전쟁을 일으켜왔다. 지구촌 제국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체는 석유쟁탈 전쟁이었다. 미국은 이 전쟁을 ‘공포와 전율’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국군도 이 전쟁에 파병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우리에게 야훼 하나님의 약탈전쟁금지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것은 바로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전쟁 또는 거룩한 전쟁을 표현하는 ‘야훼의 깃발’(예흐바 닛시, יהוה נסי)이다. 이 히브리어 용어를 정확하게는 번역한다면 ‘야훼는 나의 깃발’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훼 닛시는 막대기 끝에 헝겊을 매단정도의 표식이다. 기껏 모양을 낸다 해도 하나의 깃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표식의 의미는 히브리 해방노예 공동체가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의 백성’이며 ‘야훼 하나님을 따르며 그분과 한 공동체’라는 뜻이다.

이제 ‘야훼의 깃발’아래 모인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약탈전쟁을 통한 노예세상에서 해방과 구원을 맛본 야훼신앙․희년신앙 공동체다. ‘야훼는 나의 깃발’이라고 외치는 해방노예들은 한길같이 모든 약탈전쟁에 반대하며 그 전쟁에 저항한다. 그러므로 히브리 해방노예들은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위해 투쟁하는 용사들이다.

 

그러나 만약 야훼의 깃발을 ‘야훼는 나의 권위, 나의 능력, 나의 권좌’ 따위로 이해하면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곧바로 약탈전쟁으로 퇴행하고 만다.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세상은 아예 잊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오롯이 인간의 폭력성과 탐욕성만이 난무하는 약탈전쟁․노예세상으로 다시 떨어져 내리고 말 것이다.

이렇듯이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깃발아래 인간의 폭력과 탐욕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 제친 왕이 바로 사울 왕이다. 나아가 철저하게 야훼의 깃발을 ‘나의 권좌, 나의 능력, 나의 권위’로 퇴행시켜 평생 약탈전쟁을 일삼은 왕이 다윗 왕이다. 물론,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주의 눈으로 바라보면 위대한 왕이다. 그러나 다윗 왕은 그의 폭력과 약탈욕구로 인해 평생토록 신앙하고 모셨던 야훼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자격을 발탈 당했다. 뿐만 아니라 후대의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특별히 이사야로부터 실패한 신앙인이며 실패한 왕조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다윗왕의 아버지 ‘이새의 뿌리’에서 새로운 평화의 왕이 나타나기를 기대해야만 했다.

 

서구 제국주의 교회들도 야훼의 깃발을 치켜들고 식민지 약탈전쟁을 일삼았다.

 

근대에 이르러도 서구기독교회도 야훼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제국주의 약탈전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서구교회가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폭력과 탐욕의 금융자본주의 불노소득 약탈전쟁의 앞잡이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그 서구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21세기 제국 미국교회는 지구촌 모든 약탈전쟁의 주범이다. 나아가 그 아류로써 크게 성장한 한국교회도 온갖 종교폭력과 약탈욕구로 달아올랐다. 21세기 한국대형교회들은 이 땅의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맘껏 희롱할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게 약탈함으로써 배를 불린다.

그러나 본문은 ‘야훼 닛시’의 구체적 의미를 ‘야훼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더불어 싸울 것이다’라고 새긴다. 한마디로 ‘야훼는 나의 깃발’이라는 히브리어 용어의 참된 의미는 ‘야훼께서 약탈자들과 더불어 대대로 투쟁 하신다’라는 신앙고백이다.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야훼의 깃발 아래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전쟁’은 계속된다. 여전히 야훼 하나님을 등진 금융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약탈전쟁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우리사회는 역사의 길목에서 폭력적이고 잔인했던 군사독재정권을 이어받은 정치집단 가운데서 대통령을 뽑아왔다. 그러므로 21세기 예수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약탈과 폭력에 저항하는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거룩한 투쟁을 수행해야한다.

그런데 21세기 약탈전쟁의 양상은 구약성서 본문의 시대와는 너무너무 다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 21세기 맘몬․자본을 숭배하며 열렬한 불노소득 추종자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워런버핏, 빌게이츠 등 지구촌 유수한 금융투자자들의 행태를 추종하며 온갖 금융투자 또는 부동산투자에 목을 매기 일쑤이다.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면서 화려한 금융시스템 불로소득 불나방이 되어 채무노예세상으로 달려 나간다.

 

21세기 ‘야훼는 나의 깃발’ 해방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전쟁 행동지침

 

우리는 21세기 금융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 속에서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가? 우리는 21세기 야훼신앙․희년신앙 대안경제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실천행동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스승, 우리의 친구,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제자도를 따르고 행동해야 한다. 서로 나누고 섬기며, 연대하고 참여하는 예수신앙 행동동아리를 만들어야 한다. 예수의 말씀과 삶과 십자가행동을 본받아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공동체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21세기 예수신앙행동을 통하여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소비의 자본주의약탈경제를 거부할 수 있다. 맘몬․자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우리시대의 정치․사회․문화․종교기득권자들의 음모를 들춰내고 이에 대한 저항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만약 21세기 정치․경제․종교․문화 기득권자들이 맘몬․자본을 편들어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을 약탈하는 행태를 드러낸다면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 이에 저항할 수 있다.

이러할 때 우리 스스로의 용기가 되시고 힘이 되는 ‘야훼는 나의 깃발’(야훼 닛시)을 의지하기 바란다.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과 평화의 야훼의 깃발아래 뭉쳐 넉넉히 약탈자들․폭력자들에 대항하여 승리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