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시대의 언어로 읽는 예수의 비유』

잃은 양 비유, 뒤집어 바로 세우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은유

희년행동 2022. 5. 21. 21:34

잃은 양 비유

뒤집어 바로 세우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은유

누가복음 15:1-7

 

 

읽기-1

 

그때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에게 가까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투덜대며 떠들어 댔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이하여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구나!

그러자 예수가 그들을 향하여 이비유를 들어 말했다.

 

읽기-2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졌는데, 그 사람이 그것들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그 사람이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을 광야에 버려두고, 그 잃은 양 한 마리 대하여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그가 찾으면 기뻐서 자기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여러분 나와 함께 기뻐해주시오.

왜냐하면, 내가 잃어버렸던 내 양을 찾았기 때문이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의 필요를 가지지 않는 의인들 아흔 아홉 사람 보다 죄를 회개하는 한 사람에 대하여’ 하늘에서 기쁨이 있을 것이다.

 

 

낱말풀이

 

* 세리들과 죄인들 : 호이 텔론나이 카이 호이 하말톨로이 οἰ τελῶναι καὶ οἰ ἁμαρτωλοὶ

* 투덜대며 떠들어 댔다 : 디에공귀존 διεγόγγυζον, 디아 δία~때문에 + 공귀조 γόγγυζω 구시렁거리다

* 광야에 버려둔 채 : 카탈레이페이 καταλείπει, 카타 κατά 뒤에 + 레이포 λείπω 남기다

*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 포류에타이 πορεύεται 중간태․재귀동사

 

 

 

들어가는 말

 

모든 이야기에는 이야기들 마다 상황과 사건이 있다. 이야기꾼 스스로가 꾸며낸 익살스러운 이야기든, 실제 이야기든, 비유 이야기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또 모든 이야기에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상황이 있을 것이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상황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이야기들의 장소와 상황, 등장인물과 사건 등은 이야기꾼과 청중들 사이의 관계와 상황에 맞물려 다양한 은유들을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읽기-1’에서는 아주 도드라지게, 예수에 관하여 아주 상투적인 상황그림이 드러나 있다.

“그때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께 가까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투덜대며 떠들어 댔다.”

복음서에는 예수에 대한 이러한 상투적인 상황묘사를 전제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욕하고 비난하는 구호가 있다.

“예수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다.”

이점에서 본문비유의 상황그림은 비유에 대한 상황 서술일 뿐만 아니라, 예수의 복음 선포와 실천행동, 예수의 삶의 마당 전체에 대한 상황서술이다.

이러할 때, 본문비유의 상황그림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 선포, 복음 실천행동에 대한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세력들의 적대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예수와 더불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세리들과 죄인들, 갈릴리 민중들에 대한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세력의 불안증이 생생하고 절절하다.

이제, 본문비유의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본문비유를 읽기로 한다. 그러면서 본문 비유를 읽고 해석하는 주제로 ‘잃은 양 비유, 뒤집어 바로 세우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은유’라고 제목을 정한다. 본문비유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읽고 새기며 비유의 뜻을 찾아 나가기로 한다.

 

이끄는 말

 

성서학자들은 본문 ‘읽기-1’에 대하여 누가복음 저자가 ‘예수의 잃은 양 비유, 잃은 드라크마 비유, 잃은 아들 비유’ 등, 하나의 주제로 이어지는 비유들에 대한 상황그림으로 덧붙였다고 여긴다. 물론, 예수는 잃은 양 비유에 뒤이어서 바로, 세 개의 비유를 한자리에서 한꺼번에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저자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에 대한 분명한 신앙선포, 신앙 실천행동의지를 가지고 세 개의 비유들을 한 문단에 배치했으리라. 그 점에서 본문의 ‘잃은 양 비유’에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신앙공동체’에 대한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세력의 불안증과 적대감뿐만 아니라, ‘예수신앙 공동체로써 초대교회’에 대한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불안증과 적대감도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언제, 왜, 잃은 양 비유를 이야기 하게 되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가난한 이들, 고아와 과부, 세리와 죄인들, 심지어 창녀들과도 함께 언제든 공동체밥상을 차렸다. 그런데 밥상은 할 수 만 있다면 하루에도 두어 차례씩 차려야 하는 것이고, 예수는 거의 날마다 이러한 공동체밥상을 차렸을 것이다. 또한 그럴 때마다, 소위 바리새파와 서기관 장로들로 대표되는 유대 종교․사회 기득권세력은 예수를 마구 욕하고 비난했을 것이다.

“먹보, 술꾼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들과 함께 공동체밥상을 차리는구나!”

예수는 유대 종교․사회 기득권세력의 이러한 비난에 물러서지 않고 맞서서 유대 대중들을 향하여 잃은 양 비유이야기를 했으리라.

실제로, 유대 종교․사회 기득권세력은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대어 권력을 키우고 늘리며 넓혀왔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를 통하여 유대 하층 민중들에게 ‘죄인’이라는 종교․사회적 낙인을 찍어 배제하고, 차별하며, 왕따 시켜 왔다. 그럼으로써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유대 종교․사회공동체 안에서 권력을 누리고 민중들을 억압하며 착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 갈릴리 민중들로부터 예루살렘 하층 민중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갈릴리와 유대지역과 예루살렘 하층 민중들 사이에서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죄인’이라는 낙인을 지워내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유대 하층 민중들은 자신들에게 덧 씌워진 억압과 착취의 종교․사회․정치적 멍에를 벗어던졌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세력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불안증과 적대감’을 더 이상 억 누를 수 없게 되었다.

본문의 잃은 양 비유는 이러한 유대 종교․사회 현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본문비유에서는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나라 복음 선포와 열렬한 민중들의 환호성이 들리지 않는다. 도리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예루살렘 성전세사종교 체제의 불안증과 적대감이 거세다. 나아가 세리들과 죄인들과 심지어 창녀들과 함께 밥상공동체를 차리는 갈릴리 민중의 아들 나사렛 사람 예수의 태도와 행동에 대한 예루살렘 대중들의 냉소가 사나울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현실 상황에서, 예수는 잃은 양 비유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매여 사는 유대 대중들의 삶의 마당을 트집 잡고 따진다. 예수는 결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세력을 너그럽게 이해하거나 관계개선을 꾀할 뜻이 전혀 없다. 나아가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의 종교노예로써 스스로의 신앙과 삶에 만족하는 유대 대중들에게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참여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예수는 잃은 양 비유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맞서서 성전제사종교 이데올로기 우상을 뒤집어엎는다. ‘율법과 죄, 의인과 죄인, 심판과 처벌, 성전제사와 죄 사함’이라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이데올로기 우상을 뒤집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신앙은유를 증언한다.

따라서 잃은 양 비유에서 예수의 어투는 처음부터 맞서 싸우려는 투쟁과 조롱으로 날이 서있다. 이제, 비유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예수께로 몰려드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보며,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이하여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 구나’라고 투덜거리고 떠들어 대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졌는데, 그 사람이 그것들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그 사람이 아흔 아홉 마리를 광야에 버려두고, 그 잃은 양 한 마리 대하여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이 예수의 이 물음에 대하여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예수는 ‘예, 맞아요’라는 유대인 청중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했을까? 여기서 나름대로 예수의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자.

“아니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거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겠다고, 아흔 아홉 마리 양을 광야에 버려두다니. 그러고도 목자라고 할 수 있어?”

이와 관련하여 잃은 양 비유의 목자는 여러 명의 목동들을 고용해서 큰 목장을 경영하는 목장주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개의 가난한 목자라면 스무 마리에서 서른 마리 정도 자기 양들을 쳤을 것이고, 많다고 해도 비유에서처럼 백 마리 정도였을 것이다. 유대지역에서는 삼백 마리 이상 큰 무리의 양떼를 칠 때라야 대규모 목축업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니 본문비유의 목자는 몸소 자기 양떼를 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품꾼 목동들을 거느릴 만큼 넉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유대 광야에서 작은 양떼를 치는 목자라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려고 아흔 아홉 마리 양을 광야에 버려두는 짓거리를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예수시대의 유대인들이라면 광야에 양떼를 버려두는 위험성이 얼마나 큰지, 모두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예수가 풀어내는 비유이야기의 내용’에 대하여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복음 저자는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을 향한 이 물음을 한 문장으로 뭉뚱그려 하나의 물음으로 묶어서 기록했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예수의 이 물음을 듣고 반응할 때, 두 번의 물음으로 끊어서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는,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을 광야에 버려두지 않겠느냐’이다. 이와 관련하여 유대광야에는 늑대나 표범, 혹은 사자 등 양떼를 흩어 놓거나 해치려는 맹수들이 부지기수이다. 거기에다가 간혹, 약탈자 무리들의 약탈위험도 제켜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점에서 본문비유의 유대청중들은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을 광야에 버려두는 목자의 무책임과 무모함’에 몹시 놀라서 분노했을 것이다.

“아니, 무슨, 그따위 목자가 있단 말이야?”

또 하나는,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하여 찾을 때 까지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이다. 광야를 이동하면서 양떼를 치는 목자는 백 마리의 양떼 가운데서 양 한 마리가 사라지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없다. 광야에서 양떼로부터 떨어져, 길을 잃은 양 한 마리의 생존은 목자의 능력 밖의 문제이다.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는 것은 때와 상황이 맞고, 운도 따라야 한다. 비유에서처럼 광야에서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매는 것’은 미련한 행동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의 비유의 청중들은 목자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매우 언짢게 여겨 웅성거렸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네!”

물론, 예수 자신도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의 이러한 반응들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이 예루살렘 성전제사 종교체제에 매여 자발적 종교노예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유의 청중들이 비유이야기에 숨겨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은유를 헤아려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 빤한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는 청중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예수는 잃은 양 비유를 통하여 비유의 청중들에게 자신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전달하려고 할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비유의 청중들의 시끄럽고 어수선한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재빠르게 자기 말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그가 찾으면 기뻐서 자기 양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여러분 나와 함께 기뻐해주시오. 왜냐하면, 내가 잃어버렸던 내 양을 찾았기 때문이오.”

여기서 예수는 청중들의 화난 감정과 시끄러움 속으로 비유의 절절하고 생생한 하나님나라 복음은유를 던져 넣는다.

“잃은 양 한 마리는 건방지게 양떼를 바른 길로 이끄는 목자를 거부하고 스스로 양떼를 떠난 것일까? 아니면 잃은 양이 연약해서 양떼 무리들을 따라 잡지 못하고 목자로부터 떨어진 것일까?”

예수에게는 잃은 양의 이런저런 성질과 됨됨이가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리라.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에는 갈릴리와 유대 민중들뿐만 아니라, 일부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도 섞여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제, 예수는 비유에서 광야에 버려둔 아흔 아홉 마리 양들에 대하여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은 기쁨으로 인해 ‘광야에 버려둔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의 존재자체’가 예수의 비유에서 지워져 버렸다.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 중 누구라도 특별한 관심과 열심을 보이지 않았을 ‘광야에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때문에, 도리어 멀쩡한 양 아흔 아홉 마리의 존재가 비유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완전하게 잊혀졌다.

이제야말로, 예수의 비유에서 ‘잃은 양 비유, 뒤집어 바로 세우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은유’가 드세고 굳세게 드러나 자리를 차지한다. 한마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잃어버린 양, 곧 가난하고 힘없는 죄인들의 나라이다. 고아와 과부와 세리들과 창녀 등, 종교․경제․사회적 낙인이 찍힌 약자들의 나라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하늘 문을 여시고 이 땅으로 오셨다. 하나님은 땅의 권력과 지배체제, 거기에 기생해서 특권을 누리는 기생종교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모든 죄인들을 아낌없이 용서하신다. 땅의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종교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왕따 당한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을 당신의 나라로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마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잃은 양 비유 이야기 속에 숨겨진 하나님나라 복음은유로써, 예수와 갈릴리 민중들이 함께 이루어온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정당성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복음운동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창녀들이 함께 어울려 밥상공동체를 차리는 것이 정의이다.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세리들과 죄인들과 창녀 등 사회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야말로 오롯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시민권 자들이다. 예수는 잃은 양 비유를 통하여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기득권체제’ 안에서 자발적 종교노예의 삶을 사는 예루살렘 대중들에게, ‘뒤집어 바로 세우는 하나님나라 복음은유’를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또렷하게 드러내어 밝힌다.

실제로, 예수는 자신의 하나님나라 복음사역에서 갈릴리의 밑바닥 민초들을 불러 모으고 다 함께 하나님나라 잔치를 벌인다.

“자! 여러분! 기뻐하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자! 우리 모두 함께 잔치를 벌입시다. 하나님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가 갈릴리 밑바닥 민초들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차리는 공동체밥상은 비유에서 ‘잃은 양을 되찾았을 때에 맞이하는 하늘기쁨’ 그 자체다. 그것은 이 땅의 민중의 하나님께서 민중의 해방과 구원을 위하여 하늘장막을 찢으시고 ‘이 땅에 오심’이다. 이 땅의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늘용서와 기쁨의 은총이다. 땅의 권력과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종교 기득권체제의 낡은 올무를 벗겨내고 민중들을 해방하고 구원하시는 ‘하늘 뜻 이룸’이다.

예수는 잃은 양 비유를 통하여 예수의 친구들, 세리들과 죄인들을 불러 모아 요청한다.

”자! 우리가 기뻐하며 즐기자.“

물론, 예수의 이 요청은 예수시대의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과 예루살렘 대중들에게도 요청되는 하늘의 뜻이다. 나아가 21C 한국교회에게도 마땅한 하늘의 부르심이고 초청이다. 그러나 누구든, 이 땅의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종교기득권체제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이들을 거부하고서는, 이 요청에 응답할 수 없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억압받고 고난당하는 이들,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과 친구가 되어야만,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기쁨의 잔치에 동참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이하여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 구나’라고 불평하며 떠들어 대는 사람들, 세리들과 죄인들과 공동체밥상을 차리는 예수를 향하여 뒷구멍에서 욕하고 헐뜯는 신앙바탕으로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잔치를 누릴 자격이 없다. 이점에서, 예수는 잃은 양 비유이야기의 끝에서 이렇게 꼭 집어서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의 필요를 가지지 않는 의인들, 아흔 아홉 사람 보다 ‘죄를 회개하는 한 사람에 대하여’ 하늘에서 기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회개의 필요를 가지지 않는 의인들, 그들은 누구인가? 예수시대로 말하면, 제사장과 율법사들,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 유대 종교․정치․사회 기득권세력이다. 그들은 예수시대의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들이 도저히 지켜 낼 수 없는 613개의 생활율법들을 전혀 어렵지 않게 지킬 수 있는 자산가들이다. 그들은 민초들에게 무겁고 힘에 겨운 종교적 짐을 지우고, 자기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는 종교․정치․사회 기득권세력이다. 그들은 한 명의 개종자를 찾아 온 지구촌을 뒤지고 다니다가 개종자를 만나면 즉시 자기들보다 갑절이나 악한 지옥의 아들로 만들어버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서원한 일을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황금을 두고 맹세한 것들은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떠드는 자들이다. 그들은 십일조를 성실하게 바치지만, 사회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헌신짝 취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루살이를 걸러내어 먹으면서, 낙타는 꿀꺼덕 삼켜도 배탈조차 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깨끗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착취와 무절제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겉으로 아름다워 보이지만,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서 송장 같고, 회칠한 무덤들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겉으로 사람들에게 의로운 것같이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뱀처럼 간교하고 독사처럼 독한 자들이며, 지옥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는 자들이다.(마태 23장 참조)

그렇다면 여기서 ‘죄를 회개하는 한사람’은 누구인가? 땅의 권력과 지배체제, 거기에 기생하는 종교기득권 체제로부터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며 고난당하는 이들이다. 이 땅의 무지렁이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무한경쟁에서 낙오한 자들, 채무자, 파산자, 창녀,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 이들은 땅의 권력과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종교기득권 체제에서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오로지 하늘의 용서와 자비와 은총만을 바라는 이들이다.

예수는 잃은 양 비유를 통하여 이 땅의 무지렁이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하늘의 용서와 자비와 은총을 증언한다. 그럼으로써, 이 땅의 무지렁이들이 땅의 권력과 지배체제, 거기에 기생하는 종교기득권 체제로부터 돌이켜서 예수의 하나님 아빠의 나라로 떨쳐 나오도록 이끄신다. 땅의 권력과 지배체제, 거기에 기생하는 종교기득권 체제를 탈출하여 예수의 아빠 하나님의 나라에 삶의 마당을 펴는 것이야말로 참된 회개이다. 예수는 ‘그러할 때의 하늘 기쁨, 하나님의 환호’를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차리는 밥상공동체로 이 땅위에서 이루어냈다.

 

맺는 말

 

누가복음 저자는 ‘잃은 양 비유’이야기를 꺼내면서 ‘예수에 관한 상투적인 상황서술’을 먼저 내세운다.

“그때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께 가까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투덜대며 떠들어 댔다”

그럼으로써 저자는 비유의 독자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욕하고 비난하는 구호 ’예수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다‘라는 말을 비유의 배경상황으로 내어 놓는다. 아마도 그것은 본문비유를 읽고 해석하는데 참고해야 할 옳고 마땅한 진실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잃은 양 비유를 읽고 해석하는 열쇠말로 ‘땅의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종교기득권 체제에 맞서기, 뒤집어 바로 세우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은유’라는 제목을 정했다. 그리고 이 제목에 따라 본문비유 안에서 우리의 삶에 적용할 신앙은유들을 찾았다.

잃은 양 비유는 우리에게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종교기득권세력들의 상투적 구호 ’예수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다‘에 대한 신앙은유를 의심의 여지없이 또렷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21C 예수 신앙인들도 예수처럼 말하고, 예수처럼 행동하며,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따라 이 땅의 무지렁이들과 함께, 먹보가 되고, 술꾼이 되어야 한다. 파산자, 성소수자 등 사회적 낙인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땅의 권력과 지배체제, 거기에 기생하는 종교기득권체제‘에 대한 신앙저항의 봉화를 올림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헌신하는 예수신앙 실천대열을 조직해야 한다. 참으로 이제야말로, 21C 우리시대의 예수신앙인으로써의 우리의 신앙과 삶의 마당을 살피고 성찰하며 행동해야만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