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성서읽기/『희년신앙』 맥(脈)

『희년신앙』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4. 팔복선언,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 대헌장전문

희년행동 2024. 8. 9. 17:23

희년신앙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4. 팔복선언,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 대헌장전문

마태복음 5: 1-12, 누가복음 6: 20-21

 

본문읽기 1. 팔복선언 마태복음 5: 1-12

 

예수가 군중들을 보신 후 산으로 올라갔다.

그가 앉자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로 가까이 왔다.

예수가 그의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쳤다.

말하기를.

행복하여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이 자기 노느매기 땅()을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그들이 자비를 받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뵐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행동하는 사람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려 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정의 때문에 박해받은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대들은 행복하여라. 언제든지 나 때문에 거짓말쟁이들이 그대들을 모욕하고, 박해하며, 그대들을 반대하여 온갖 사악한 말들을 퍼 붓을 때, 그대들은 기뻐하고 또 기뻐하시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대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오. 참으로 이와 같이 그들이 그대들에 앞서 예언자들을 그렇게 박해했소.

 

본문읽기 2. 행복선언 누가복음 6:20-21

 

그러자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당신의 눈을 치켜들고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이들이여!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대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린 이들이여!

왜냐하면 그대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이들이여!

왜냐하면 그대들이 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이해하기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대헌장 전문

 

히브리 성서 옛 히브리들의 희년(禧年)은 글자그대로 기쁨의 해. 히브리 성서 출애굽기는 희년기쁨을 파라오 노예세상에서 종노릇하던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과 구원사건으로 증언한다. 또 희년기쁨은 마땅히 히브리 해방노예들이 건설하고 누리며 살아가야 할 해방과 구원세상이다. 이를 위해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 지파동맹과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맺으시고 꼭 지켜야 할 행동법규들을 주셨다. 그 첫 번째가 히브리들의 해방과 구원세상에서 벌어지는 칠년 빚 탕감과 노예해방이다. 참으로 어떤 히브리 사람들이 다른 히브리형제를 노예로 산다면 육년 동안만 종으로 부려야 한다. 육년이 지나 칠년 째에는 반드시 값없이 해방되어 나가야 한다.

이렇듯이 히브리 성서 안에서 희년의 기쁨은 곧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이다. 히브리들이 희년신앙 행동서사로써 희년은 레위기25요벨 쉐나트 יוׄבֵל שְׁנַת 해방뿔나팔의 해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사야 61장에서도 희년을 야훼의 기쁨의 해라고 증언한다. 이때 라촌 רָצוׄן이라는 히브리어 낱말의 뜻은 기쁨 또는 희열이다. 야훼하나님의 참 기쁨은 빚으로 팔려온 노예들에게 빚 탕감과 노예해방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히브리들의 희년신앙행동의 밑바탕은 야훼께서 일으키신 출애굽 해방과 구원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들에게 명령하신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은 히브리들의 해방과 구원세상을 위한 사회경제영성이었다. 히브리 노예들의 생활공동체 지성이고 감성이며 행동의지였다. 이제 수많은 세월이 흘러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으로 재구성되었다. 그것은 곧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통해서 이 땅 풀뿌리 사람들의 삶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꺾어진 사람들을 감싸주는 것이다. 사로잡힌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다. 묶인 사람들에게 놓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모든 애통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산상설교와 누가복음 6장 평지설교에서 자신의 하나님나라 복음 대헌장을 설명한다. 그것은 야훼 하나님께서 옛 히브리 지파동맹과 함께 맺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에 대한 재해석 또는 재구성이다. 예수는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 대헌장 전문으로써 마태복음5장 첫 문단에서 팔복선언’(누가복음 행복선언)을 내어놓았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유대교와 유대사람들의 율법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나아가 유대인들의 율법으로써 옛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새롭게 재구성했다.

 

예수가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으로 재구성하다.

 

내가 율법과 예언자들을 뒤집어엎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뒤집어엎으려고 온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려고 왔다. 아멘,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 전 까지는 율법의 작은 뿔 하나,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기 전 까지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거나,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불려 질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려 질 것이다.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의 정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보다 더 넘치지 않는다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17-20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 엘리트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 율법학자들과 적대적이었다. 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들도 예수를 먹보요 술주정뱅이라고 욕했다. 실제로 예수는 시대의 율법전문가로 행세하면서 야훼하나님의 율법을 왜곡하고 퇴행시키는 자들과 싸웠다. 예루살렘 성전제사 종교체제를 통해서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유대 사회경제·종교·정치 기득권 세력들과 투쟁했다.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의 종교사익과 종교위선을 비판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 옛 희년신앙 행동법규로써 율법을 왜곡하고 퇴행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야훼하나님의 율법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613개에 이르는 생활율법을 만들어 퍼트렸다. 이들이 만든 생활율법은 예수시대 유대와 갈릴리 땅 풀뿌리사람들의 신앙과 삶을 옥죄는 종교올무였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갈릴리 땅 풀뿌리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아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예수는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낙인찍는 왜곡과 퇴행으로서의 율법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내가 율법을 뒤집어엎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완성하려고 왔다고 선언한다. 이때 본문은 플레로사이 πληρσαι 완성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한다. 이 동사의 원형은 플레토 πλήθω라는 동사인데 가득 채우다, 온전하게 성취하다라는 의미다. 물론 예수의 입말로 표현한 율법의 작은 뿔 하나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문자로만 이해하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롯이 예수는 이 선언을 통해서 율법의 진실을 찾고 야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행동하려는 의지를 표현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율법이라는 표현을 바꾸어 엔톨레 ντολη 계명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계명은 엔텔로 ντέλλω 책임과 의무를 명령하다라는 헬라어 동사에서 나왔다. 그럼으로써 예수의 계명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 지파동맹과 함께 맺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미쉬파팀 מִשְׁפָּטים 행동법규들을 떠올리게 한다.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지파동맹에게 희년신앙 행동계약 조건으로써 미쉬파팀 행동법규들을 명령하셨다. 유대교와 유대인들은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율법이라고 불렀다. 또 본문읽기에서는 프로페타스 προφήτας 예언자들이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예언자들은 히브리 지파동맹이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어길 때마다 야훼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곤 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디카이오쉰네 δκισύνη 정의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넘치지 못하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때 야훼하나님께서 히브리들에게 요구하는 정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자기재물들을 나누는 것이었다. 과부와 고아와 떠돌이 나그네를 보살피는 것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주고 채무노예를 해방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희년신앙 행동법규들로써 유대교와 유대인사람들이 떠받드는 율법의 실체. 이제 예수는 옛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재구성하고 완결(完結)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사랑의 이중계명을 선포한다.

 

너의 온 맘으로, 너의 온 생명으로, 너의 온 뜻으로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그런데 두 번째도 그와 똑같다. 너의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온 율법과 예언자들이 이 두 계명에 매여 있다마태복음 22:37-40

 

사실, 예수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계명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와 생활율법체제에 대항하는 새로운 희년세상 선포이다. 예수의 사랑의 이중계명은 모든 율법과 예언들을 재구성하고 완결하는 신앙행동이다. 그런데 예수가 선포한 사랑의 이중계명은 아주 새롭고 중요한 신앙진실을 담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같다라고 선언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하나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님 사랑은 참된 이웃사랑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도무지 헤아리거나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어떤 사람이 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또 하나 예수는 참으로 놀라운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황금률을 선포했다.

 

너는 너에게 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라. 네 것들을 가져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달라고 요구하지 마라. 너희는 사람들이 너희에게 베풀기를 바라는 대로그들에게 똑같이 베풀어라.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너희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느냐? 참으로 죄인들도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만일 너희가 너희에게 선을 베푼 사람들에게만 선을 베푼다면 너희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같을 일을 한다. 만일 너희가 받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만 꾸어준다면 너희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같은 것들을 되돌려 받으려고 죄인들에게 빌려준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아무것도 돌려받기를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 너희의 상이 클 것이다. 너희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누가복음 6: 30-36

 

그러므로 무엇들이든지 만약 사람들이 너희에게 베풀어주기를너희가 바라는 바가 있다면, 너희도 똑같이 그들에게 베풀어라. 참으로 이것이 율법이고 예언자들이다.” 마태복음 7:12

 

참으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상호의존 경제가 필수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활경제의 기쁨을 선물하고 은혜를 주고받는 공동체 세상임이 틀림없다. 예수는 마태복음 산상설교를 통하여 옛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 대헌장으로 재구성했다. 이제 필자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대헌장 전문격인 팔복선언(또는 행복선언)을 읽고 풀이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체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원시 예수신앙 공동체

 

맨 처음 기독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예수신앙 공동체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원시 예루살렘 예수신앙 공동체가 그랬다. 1세기에서 3세기까지 지중해세계에 널리 퍼져있던 초대교회들이 그랬다. 무엇보다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와 함께하던 갈릴리 풀뿌리 사람들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가 그랬다.

한반도의 맨 처음 교회들도 가난한 풀뿌리 사람들의 예수신앙 공동체였다. 이 땅의 초대교회들은 배고프고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이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의 굶주림을 채워주었다. 진실한 신앙과 삶의 관계를 맺어나가는 생활신앙 공동체였다. 분하고 억울한 일들과 슬프고 절망스러운 일들을 함께 거들고 나누는 것이 교회의 마땅한 신앙실천행동이었다. 필자는 지금도 어린 시절 우리 집 담장 위로 넘나들던 이웃집 권사님의 거칠고 두툼한 손을 기억한다. 평생농사일로 마디마디에 굳은살 박인 늙으신 권사님의 거칠고 두툼한 손을 떠올린다. 우리 집 식구들이 굶고 있다는 것을 어찌 그리도 잘 아시는지? 고구마와 감자와 보리쌀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담장 위로 넘겨주시던 옛 시골교회의 그 권사님을 추억한다.

 

 

말씀풀이

팔복선언,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대헌장 전문

21세기 한국교회의 신앙표지

 

21세기 한국교회의 신앙표지’(信仰標識)는 초대교회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예수신앙 공동체와 정반대다. 21세기 한국교회의 신앙표지는 이웃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부와 권력을 더 많이 독점하고 착취하고 쌓는 것이다. 독점재벌맘몬권력 지배체제에서 불로소득계층으로 우뚝 서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야훼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배척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대신해서 맘몬자본세상의 부와 권력을 하나님으로 숭배한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교회와 시대상황 속에서 새로운 교회의 모습들을 어디서 어떻게 찾고 배워야 할까?

이제 필자는 마태복음서 팔복선언과 누가복음서 행복선언을 읽고 풀이하면서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실제로 팔복선언(행복선언)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 대헌장 전문과 같다. 예수가 하나님나라 복음 대헌장 전문 속에서 옛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어떻게 재구성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21세기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마태복음 팔복선언본문과 누가복음 행복선언본문을 서로 비교하며 살펴보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성서학자들은 누가복음 행복선언의 뿌리를 ‘Q복음 곧 예수의 어록으로 이해한다. 이에 반하여 마태복음 팔복선언은 누가복음 행복선언을 밑바탕삼아 마태복음서 저자가 창작했거나 다른 행복이야기 전승들을 보태 넣었을 거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곧잘 마태복음서 팔복선언을 산상보훈이라고 부른다. 너무나도 귀하고 보배로운 말씀이라서 보훈’(寶訓)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상보훈을 한 구절 한 구절 떼어서 깊이 묵상하기를 즐겨한다. 누가복음서 행복선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교우들이 수도 없이 팔복선언을 읽고 묵상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존신앙과 삶은 결코 이 말씀들에 설복당하지 않는다.

 

팔복선언(행복선언) 해석방법

 

마태복음서 팔복선언을 읽으면서 21세기 기독교 신앙인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도대체 가난이 어떻게 행복으로 연결될 수 있단 말인가? 나아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란 말과 함께 묵상한다면 더 많이 헷갈리게 마련이다. 도대체 마음 또는 심령으로 가난하다는 게 뭐야? 그러면서 나름대로 생각들을 뜯어 맞추거나 모르겠다라고 도리질을 해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천년 기독교역사 속에서 서구교회가 머리를 짜내고 생각들을 뜯어 맞춰서 얻은 마태복음서 팔복선언 해석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마태복음서 팔복선언을 누가복음서 행복선언에 비교해서 해석하는 방법이다. 마태복음서가 누가복음서처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때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춥고 배고프며 불행한 시절을 보내지만 이제 곧 하나님나라가 오면 모든 고생 끝, 행복시작이라는 현실해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물질로는 가난해도 마음만은 풍요롭게 살아야지 마음조차 찌들어 산다면 그게 신앙인의 자세일까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한편 이해가 되고 현실에서 수긍할 말한 해석이다. 요즈음 유행하는 힐링교회에 딱 맞는 해석이기도 하다. 나아가 무한경쟁에서의 실패하고 가난과 절망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종교피안(彼岸)을 제공한다. 아주 적절한 위로와 치유를 제공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팔복선언에 대한 이런 해석은 누가복음 행복선언의 신앙진실과 사뭇 다르다. 행복선언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신앙언어가 드러내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치열한 자기혁신과 신앙행동의지를 철저하게 외면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아무런 실체가 없는 종교 이야깃거리로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다. 이러한 해석은 21세기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대항세상(對抗世上)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려는 예수신앙인들의 신앙행동 의지를 무력화 할 위험이 크다. 이러한 현실해석은 신앙인의 참된 신앙실천 행동과 그에 따르는 무한한 신앙신비와 역동성을 잃어버리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의 마당으로 침투해오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종교 관념과 표상으로 화석화해서 입에 발린 고백교리로 만들 위험성이 크다. 실제로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팔복선언을 하나님나라 고백문서처럼 외워댄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욕구불만 신앙발달장애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두 번째 마태복음서 팔복선언 해석방법은 서구교회로부터 전해져 온 풍유(諷諭) 또는 상징해석이다. 얼마가 됐든, 어떻게 벌었든, 넘치도록 사유재산을 가진 사람이라도 영과 마음 또는 심령(心靈)’속에서 탐욕을 버렸다면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서구교회의 해석을 쫓아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성수련 또는 마음 닦기에 몰두한다. 그럼으로써 팔복선언에 따르는 사회경제종교정치 공동체 신앙행동의 치열함과 엄중함을 해소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도피는 예수신앙인으로서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무시하게 되는 위험이 크다. 그것은 곧 21세기 맘몬자본 지배체제를 향한 대항세상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서 비켜서려는 신앙태도다. 그럼으로써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서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예수신앙 생활영성도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 예수신앙 생활영성을 잃게 되면 팔복선언 속에 숨겨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신앙행동계시도 깨닫지 못한다. 그것은 참으로 바르지 못한 반신앙 잔꾀로써 사탄의 유혹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이 마태복음서 팔복선언에 대한 서구교회의 풍유 또는 상징해석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체와 거리가 멀다. 팔복선언이 드러내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은 이 땅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값싼 위로와 동정의 말장난이 아니다. 무슨 마음 닦기나 영성훈련의 표어도 아니다. 나아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어떤 신비한 종교계시이거나 종교 신화도 아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종교계시 또는 해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야말로 예수신앙인들의 삶의 마당에서 마땅히 실천해야하는 신앙과 삶의 과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치열한 신앙행동이고 신앙삶이다. 21세기 교회와 교우들의 삶의 마당에서 드러내야 할 마땅하고 참된 예수신앙표지’(信仰標識).

 

팔복선언에 나타난 프뉴마티 πνεματι (또는 )으로 가난한 사람들

 

마태복음 팔복선언과 누가복음 행복선언에 나타나는 헬라어 용어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숨은 신앙은유들을 드러낸다. 숨겨져 있지만 분명하게 드러나는 신앙과 삶의 의미들을 담고 있다. 먼저, 팔복선언의 첫 낱말은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 행복한이라는 헬라어 형용사다. 필자는 행복하여라라는 서술문장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도대체 가난이 어떻게 행복으로 연결될 수 있지라는 당연한 현실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프뉴마티 πνεματι 영으로가난한 사람들이란 문구는 누구라도 헷갈리게 만든다. 특별히 우리말 성서는 심령(心靈)’이라는 어려운 한자말로 번역했다.

실제로 신약성서에서 프뉴마라는 헬라어 낱말은 바람 생명 생명기운 등 여러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마태복음 팔복선언에서 프뉴마는 여러 의미들의 총체로써 () 또는 삶을 은유한다. 나아가 하나님과 하나로 창조생명생태계의 밑바탕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영을 의미한다. 예수신앙인들은 하나님이 거룩한 생명의 영을 힘입어 가난 속에서도 행복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팔복선언에서 ()으로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 대헌장 전문으로써 팔복선언 신앙의미를 표상(表象)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팔복선언에서 생()으로 프토코이 πτωχοί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때 팔복선언에서 가난한이라는 헬라어 낱말에 숨겨진 신앙은유는 성서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만큼 그 의미를 드러내준다. 실례로 프토코스 πτωχός 가난한이라는 헬라어 형용사는 프토스소 πτώσσω 움츠러들다 또는 웅크리다라는 동사에서 왔다. 따라서 프토코스라는 용어는 한 끼 배부른 식사만으로도 생()의 모든 것을 만족하는 가난한 이들의 움츠러든 욕망을 드러낸다. 무엇에든, 무엇으로든 만족하는 움츠러든 삶의 욕망을 훈련한 것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은유. 그렇다면 자기 생()의 욕구와 욕망과 탐욕을 웅크릴 수 있는 힘이 어디로부터 올까? 얼마만큼 자기 생()의 욕구와 욕망과 탐욕을 웅크려 작게 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자기현실 삶의 문제로 남겨 둘 수밖에 없다.

이렇듯이 팔복선언에서 ()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를 향한 대항세상(對抗世上 Anti Society)으로써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깨닫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신비와 역동성을 체험함으로써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려는 사람들이다. 21세기 독점금융 자본주의 시장경쟁 체제의 무한경쟁독점쌓음소비라는 생()의 구조를 벗어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실천행동 하는 사람들이다. 야훼하나님의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세상을 살면서 삶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다. 21세기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라도 움츠러든 아주 작은 욕망으로 자기 생을 살며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무소유이니, 자발적 가난이니, 청부/청빈이니 하는 논쟁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런 논쟁에 관심도 없고 그렇게 논쟁할 이유도 없다. ()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그냥 그 삶 자체로 가난하고 소박하고 청빈하다. 팔복선언에서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부동산대박, 펀드대박, 일류학벌, 엘리트주의 따위가 있을 수 없다. 그런 따위에 대한 관심과 지식과 정보도 없다. 또한 부와 권력에 대한 숭배와 탐욕도 없다. 부와 권력의 결핍에 대한 불안과 절망과 두려움조차도 없다. 마태복음 팔복선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생으로 가난한 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팔복선언은 ()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이 땅의 하나님나라에서 누리는 생의 해방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노래한다. 부유하고 독실한 기독교인들이라 해도 생으로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이 땅의 하나님나라는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

 

()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은 결단코 독점 금융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에서 자기욕망성취가 아니다. 따라서 21세기 무한경쟁독점쌓음소비라는 신자유주의 삶의 구조에 목을 매는 사람들은 도저히 꿈꿀 수없는 행복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고진감래(苦盡甘來)이거나 또는 소원성취(所願成就)가 아니기 때문이다. 맘몬·자본세상에서 부와 권력에 목을 맨 사람들은 결단코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을 넘볼 수 없다. 그들이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으로 누리는 행복을 넘보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자기 삶의 마당을 부와 권력숭배의 제단으로 치장해 놓은 사람들에게 무슨 마음 닦기나 영성수련이 가능할까?

이렇듯이 생()으로 가난한 이들의 행복이란? 부와 권력숭배의 제단에 바쳐진 자신의 삶의 마당을 정화하려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야훼하나님의 은총이다. 21세기 독점 금융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에 목을 매던 삶의 구조를 무너트린 사람들에게 내리는 하늘사랑이다.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신비로운 신앙과 삶의 능력이다.

이렇듯이 생으로 움츠러진 욕망을 따라 자족하는 사람들에게 21세기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는 도저히 두둔할 수 없는 사탄의 체제다. ()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세차고 꿋꿋하게 21세기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를 향한 대항세상의 삶을 산다.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행동하며 누리는 생()의 모험을 즐거워한다. 그런 생의 모험가운데서 기쁨과 행복을 누린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팔복선언은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누가복음 행복선언에서는 하나님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때 팔복선언의 하늘나라는 행복선언의 바실레이아 투 테우 βασιλεία τοθεο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은유다. 유대인들은 야훼 또는 여호와라는 하나님 이름을 너무도 거룩히 여겨 직접 부르지 않는다. ‘아도나이-주님이라고 에둘러 부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도 대놓고 말하지 않고 에둘러서 하늘나라라고 말한다.

실제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곧 임마누엘이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 노예세상으로부터 야훼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사건을 체험한 히브리들이 꿈꾸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나라. 야훼하나님의 솰롬 שָׁלוֹם 평화세상이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 삶의 욕구와 욕망과 탐욕을 아주 작게 웅크려서 자기 생활경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무한경쟁독점쌓음소비를 향한 대항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이렇듯이 예수는 그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는 엔토스 휘몬 ντς μ너희 안에있다고 선언한다.(누가복음 17:21) 이때 엔토스라는 헬라어 전치사는 ‘~안에, ~사이에, ~말미암아등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서 엔토스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관계맺음을 모두 포괄한다. 하나님나라는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모든 활동과 삶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의 활동과 삶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의 활동관계와 삶의 관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가 세우지고 커지고 넓어진다. 이 모든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시간과 공간과 관계 속에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팔복선언(행복선언)과 교회의 행동역할 그림 1.

 

21세기 성서독자들은 마태복음 팔복선언 또는 행복선언에서 두 가지 교회들의 행동역할 그림을 찾을 수 있다. 먼저, 교회는 펜툰테스 πενθοτες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위로를 베풀 수 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이때 팔복선언 본문은 펜테오 πενθέω 애통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한다. 이 동사의 명사형이 펜토스 πένθος인데 그 뜻은 서럽고 슬픈 고통 또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다.

또 누가복음 행복선언은 지금 우는 이들이여라고 표현한다. 이때 누가복음 행복선언 본문이 사용하는 클라이오 κλαίω라는 헬라어 동사는 통곡하며 울다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지금 우는 이들을 돌보고 감싸줌으로써 그들을 웃게 할 수 있다. 교회는 애통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찾아줌으로써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이렇듯이 팔복선언(행복선언)에 따른 신앙행동이야말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우는 사람들을 웃게 하는 교회와 교우들의 행동역할 그림이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팔복선언은 그들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때 팔복선언 본문은 파라칼레오 παακαλέω 가까이 부르다라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한다. 이 동사는 파라 παρά 곁으로 또는 가까이 + 칼레오 καλέω 부르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다. 따라서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들의 곁으로 가까이 가서 그들의 슬픔과 고통에 소통하고 참여하며 연대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또는 때때로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을 교회로 또는 교우들의 삶의 마당으로 초대해서 위로하고 힘을 북돋울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파라칼레오라는 동사로부터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보혜사(保惠師)’라는 성령에 대한 새로운 신앙은유(信仰隱喩)가 나타났다. 보혜사는 교회와 교우들에게 흔히 위로자 또는 중보자로 알려져 있다.

한편 누가복음 행복선언 본문은 겔라세테 γελάσετε 그대들이 웃을 것이오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지금 교회 안에서 또는 교우들 가운데서 우는 사람들이 있다면 교회와 교우들은 그들에게 웃음을 찾아 주어야 한다. 이때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신앙결사체로써 교회는 맘몬자본세상 웃음따라 하기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신앙공동체로써 교회와 교우들의 웃음은 맘몬자본세상 교만한 웃음에 휩쓸릴 수 없다.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로 교회의 웃음은 스스럼없는 웃음, 거리낌 없는 웃음, 여럿이 함께 웃는 공동체 웃음이어야 한다.

이제 21세기 교회들의 바른 신앙표지’(信仰標識)는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다. 나아가 21세기 교회의 바른 신앙행동 역할은 지금 우는 이들의 삶속으로 침투하는 거침없고 스스럼없는 해방과 자유, 생명평화세상 웃음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애통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시대 우는 이들의 삶의 자리는 맘몬자본지배체제 빚 세상경제다. 21세기 모든 눈물은 무한경쟁독점축적소비라는 삶의 구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폭압으로 인해 서러운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맘몬자본 지배체제의 은총을 잃어버리고 억울함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실제로 사람의 생명살이는 종교 관념과 철학 사유만으로는 모두 다 포섭하지 못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생명살이의 시작과 과정과 끝은 너무도 선명하고 절절하며 속절없다. 이제 이 땅의 뭇 생명들의 필요와 쓰임, 고통과 절망, 희망과 용기, 의지와 분노 등을 세밀하게 알아채고 깨달아야 한다. 그 알아챔과 깨달음이 뭇 생명살이 안에서의 신앙행동이고 진보행동이다. 더 이상은 뭇 생명살이의 마땅한 권리가 국가와 시장, 기업과 정치, 자본과 종교 이데올로기에 농락당하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코로나19사태 속에서 반지하방 세 모녀 자살사건, 청년들의 자살사건, 독거노인들의 자살사건, 차량 안 가족동반 자살사건등 가난과 빚에 짓눌려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애통하는 사람들의 삶의 마당에서 한국교회와 교우들을 찾아볼 수 없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사회는 20144.16 세월호 참사를 경험했다. 4.16 세월호 참사는 34명의 안타까운 목숨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사회는 202210.29 이태원참사를 막지 못했다. 4.16 세월호 참사가 우리사회 안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지난해 발생한 10.29 이태원참사로 대한민국 사회는 또 다시 159명의 소중한 목숨들을 떠나보냈다. 이 두 차례에 거친 사회참사의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고 연대하는 교회와 교우들은 아주 적다. 그 반대로 대다수의 교회와 교우들은 이 두 번의 사회참사를 헐뜯고 모욕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신앙결사체로서 21세기 예수신앙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로써 맘몬자본질서와 가치로부터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 ‘무한경쟁독점쌓음소비라는 맘몬자본숭배 교리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교회와 교우들 그리고 이 땅에서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이 다함께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누리며 파안대소(破顔大笑)할 수 있다.

 

팔복선언(행복선언)과 교회의 행동역할 그림 2.

 

두 번째, 팔복선언(행복선언)과 교회의 행동역할 그림은 지금 굶주리는 이들을 배부르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신앙행동 공동체. 이때 마태복음 팔복선언은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어떤 정의일까?

서구교회는 오래도록 팔복선언에서 메시아 종말론에 따른 새로운 구원질서로써 의()’를 찾았다. 임마누엘복음 시대상황에 걸맞지 않은 다윗후손에서 나오는 정치메시아를 대망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의()를 찾았다. 물론 서구교회는 에둘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의로움이라고 선동했다. 필자는 기독교회의 교리로써 초대교회로부터 현대 서구교회에서까지 팔복선언에서 찾아야만 했던 의로움을 나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가 팔복선언 육성(肉聲)에서 정말로 그런 정의를 말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 시대에서도 그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정의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착취당하지 않고 억압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 등 사회경제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정의다. 옛 히브리 지파동맹의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만들어가는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세상이 정의다.

실제로 누가복음 행복선언은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이들이여라고 단순하게 정의를 말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편드시고 두둔하는 야훼하나님의 정의를 크게 드러내는 예수의 행복선언이다. 옛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완벽하게 재구성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체를 증언하는 행복선언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서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지금 굶주리는 이들이 배부르게 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팔복선언에서도 디케 δίκη 마땅하고 올바른 일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때 마태복음 팔복선언이 사용한 딮사오 διψάω라는 동사는 갈망하다라는 의미다. 맘몬·자본세상 속에서 올바르고 마땅한 행동으로써 정의를 갈망하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다.

이렇듯이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정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 교회의 마땅한 행동역할이다. 여기서 팔복선언 본문은 콜타스테세스테 χορτασθήσεσθε 그대들은 배부르게 될 것이다라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한다. 이 동사는 콜토스 χόρτος 꼴을 먹이는 장소라는 명사에서 유래한다.

실제로 21세기 교회들은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는 밥상공동체로써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교회들은 참된 예수신앙 공동체로써 이 땅의 하나님나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교회들이 차리는 시대의 밥상공동체야말로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린 이들이여, 그대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다라는 예수의 선언에 대한 응답이다. 21세기 교회들의 마땅한 행동역할 그림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신양결사체로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고 행복하게 되는 팔복선언에 응답해야하는 시대의 밥상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이여. 그들이 땅을 받을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 팔복선언은 온유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한다. 이때 본문은 온유한이라는 뜻으로 프라에이스라는 헬라어 형용사를 사용한다. 이 헬라어 형용사의 원형은 프라우파티아 πραϋπαθια 온유라는 명사다. 이 명사는 푸라우스 πρας 너그러운 + 파스코 πάσχω 고통을 당하다로 이루어진 합성어다. 따라서 온유한 사람이란 자기시대의 억압과 고통을 견디고 이겨낸 사람들이다.

예수시대 상황에서라면, 로마제국으로부터 자기 삶을 빼앗기고 약탈당하는 유대와 갈릴리의 풀뿌리 사람들이다.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 체제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채 살아가야만 하는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참여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그 땅의 풀뿌리 사람들이다. 옛 히브리 지파동맹 전통에서라면,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에 따라 노예제국 지배체제를 향한 대항세상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여는 사람들이다. 21세기 상황에서라면,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불로소득 대박욕망을 이겨내고 소박한 삶을 사는 신앙인들이다. 맘몬자본세상에서 희년 빚 탕감과 채무노예해방을 실천행동 하는 사람들이다.

이렇듯이 팔복선언은 온유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 노느매기 땅(또는 몫)’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때 본문은 클레로노메오 κληρονομέω라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한다. 이 동사는 클레로스 κλρος + 네모 νέμω 나누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다. ‘제비를 뽑아서 또는 상속으로 자기 노느매기 땅(또는 몫)을 받다라는 뜻을 갖는다. 이 헬라어 동사는 옛 히브리 지파동맹의 나할라 נַחֲלָה 가나안 땅 노느매기뜻을 고스란히 드러낸다.(여호수아기 13:1-8, 14:1-5) 그러므로 시대의 억압과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는 온유한 사람은 이 땅의 하나님나라에서 자기 노느매기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여. 그들이 자비를 받게 될 것이다.

 

또 팔복선언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한다. 이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란, 두 가지 경우로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공유공동체 자비다. 실제로 인류역사는 부와권력을 독점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비에 의지해 오지않았다. 오롯이 다수의 가난하고 힘없는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상부상조로 버텨왔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상호의존경제 공동체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세상이다.

두 번째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선한 뜻을 품고 있는 부유한 사람들의 자비다. 물론, 부와 권력을 독점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도리어 부자들에게는 자린고비 절약이 미덕일 뿐이다. 실제로 21세기에 이르러 부유한 북반구 나라들과 가난하고 힘없는 남반구 나라들의 관계가 그렇다. 지구촌 북반구에서 잘사는 나라들은 지구촌 남반구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쥐꼬리만큼도 못한 원조를 베푼다. 그러고도 지구촌 남반구의 가난한 나라들로부터 원조해 준 것보다 수십 배가 되는 가치들을 착취한다.

그렇더라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 부자들의 자비는 스스로를 맘몬자본 노예사슬에서 끊어내는 신앙결단이다. 그럼으로써 맘몬자본세상 장물아비 인생에서 벗어나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야훼 하나님께 희열을 바침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은총과 구원을 누릴 수 있다.(이사야 61:2)

그렇다면 이제 팔복선언에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 받을 자비는 무엇일까? 당연히 야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이다. 실제로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이시다.(출애굽기 3)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편드시고 두둔하신다. 그들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신다. 야훼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와 떠돌이 나그네를 사랑하신다.(시편 68:5-6)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며 고통당하는 사회경제 약자들의 삶의 마당에 함께하시며 연대하신다. 채무노예로 팔려가거나 제국주의 전쟁포로가 되거나 약탈노예가 된 히브리들을 해방하고 구원하신다.(출애굽기 21:1-11) 그들이 해방과 구원,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세상을 세우고 누릴 수 있도록 용기와 의지와 힘을 북돋우신다.

무엇보다도 야훼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빚을 탕감하고 채무노예를 해방하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한없는 자비를 베푸신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붙들어 일으키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은총과 복을 내리신다. 야훼 하나님은 부유한 사람들의 선한 행동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희열 또는 기쁨을 맛보신다. 야훼 하나님은 옛 히브리들과 함께 희년신앙 행동계약을 맺으시고 행동법규들을 주셨다. 그럼으로써 시대의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 선한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출애굽기 21-23)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여. 그들이 하나님을 뵐 것이다.

 

또 팔복선언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한다. 실제로 성서는 사람 또는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적용한다. 동물이나 여타 생명체들에게는 마음을 적용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람에게서 마음은 감정이나 충동(衝動)들이 용솟음치는 자리다. 양심사랑욕구욕망탐욕교만 등 온갖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자리는 어떻게 깨끗해져야 할까? 히브리 성서는 현대 뇌과학(腦科學)에서 다루는 기억, 통찰, 지식, 용기, 양심. 사랑, 선택, 지성레브 לֵב 심장 곧 마음자리에서 찾는다.(전도서 10:2, 잠언, 욥기) 그리고 사람의 마음자리는 하나님의 마음자리와 통한다.(사무엘상 2:35, 요한복음 14:20)

따라서 사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물려받은 카타로스 καθαρός 깨끗한 마음자리를 더럽혀지지 않도록 청소하면 된다. 사람들의 마음자리에서 교만과 탐욕을 몰아내고 사랑과 양심 그리고 회개와 선한행동을 북돋우면 된다. 이러할 때 야훼 하나님께서 히브리들과 함께 맺은 희년신앙 행동계약 행동법규들을 길잡이로 삼을 수 있다. 예수는 옛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으로 완벽하게 재구성했다.

여기서 마태복음 팔복선언은 톤 테온 오프손타이 τόν θεν ψονται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뵐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때 사용된 헬라어 동사 오프손타이는 미래형 디포(재귀)동사이다. 그런데 이 동사의 어법과 의미를 살려 본문읽기를 한다면 스스로 하나님을 뵙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점에서 오프손타이의 원형동사는 호라오 ράω이다. ‘호라오라는 헬라어 동사는 파노라마처럼 우러러 보다 또는 깨달음으로 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고대 문명사회에서 하나님은 제국주의 지배체제 만신전 안에서만 볼 수 있었다. 만신전의 제국주의 하나님들은 제사장이거나 왕이거나 하나님을 독점한 자들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우러러 뵙고 절규하며 하소연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자기욕망과 교만과 탐욕들을 작게 웅크려서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이 깨닫고 뵙게 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뜻을 쫒아서 하나님께로부터 물려받은 깨끗한 마음자리를 되찾은 사람들이 우러러 뵐 수 있는 하나님이다.

그렇더라도 야훼 하나님은 21세기에 유행하는 종교상품소비로써 마음훈련이나 영성수련으로는 뵙기 어려운 분이시다. 왜냐하면 21세기 웰빙 well-being 영성으로는 사람의 마음자리에서 교만과 어리석음, 욕망과 탐욕들을 비워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는 옛 히브리들이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따른 매일 매일의 생활영성훈련을 제안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자기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서 참여하고 연대할 것을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 야훼로부터 물려받은 깨끗한 마음자리를 자기 삶의 마당에서 매일매일 훈련하고 세워나가기를 제안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행동하는 사람들이여.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 질 것이다.

 

또 팔복선언은 평화를 실천하는 이들에게 행복을 선언한다. 그렇다면 팔복선언에서 말하는 평화란, 어떤 평화일까?

팔복선언 문맥은 분명하게 개인정서와 감상 속에서 평안을 말하지 않는다. 시대의 사회경제종교정치 공동체 평화를 강조한다. 이때 본문이 사용한 헬라어 동사는 에이레노포이에오 ερηνοποιέω 평화를 만들다이다. 이 동사는 에이레네 ερήνη 평화 + 포이에오 ποιέω 만들다 또는 행동하다로 이루어진 합성동사다. 그런데 에이레네 ερήνη 평화라는 헬라어 낱말은 에이로 ερω 연합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따라서 팔복선언이 말하는 평화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연합해서 만들어내는 사회경제종교정치 공동체 평화.

따라서 평화란? 21세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등 끊이지 않는 지구촌 제국주의 전쟁 상황에서 말한다면, ‘전쟁을 하지 않는 상태. 이와 관련하여 지구촌사회는 세계평화지수’(Global Peace Index)를 통해서 지구촌 나라들의 평화상태를 평가한다. 방위비규모, 군수산업규모, 치안상황, 전쟁사상자, 죄수규모, 조직범죄, 테러위험, 사회정치 갈등 등 23개 지표를 통해 평화를 수치화한다. 대한민국의 평화수준은 세계 55위 정도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분단국가인데다 지구촌 제국주의 전쟁세력들의 정치참여가 매우 높다. 따라서 실제 전쟁위험성은 현재의 세계 55위보다 훨씬 더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50위대 평화지수를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나마 경제가 선진국대열에 올라섰고 치안도 안전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 성서는 예흐바 솰롬 יְהוָה שָׁלוׄם 야훼 하나님의 평화를 강조한다.(사사기 6:24) 히브리 지파동맹이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따라 행동하면, 어떤 경우라도 평화를 지키고 보장하시겠다는 의미다. 실제로 야훼 하나님께서 그 땅 끝까지 반생명반평화 제국주의전쟁을 그치게 하신다. 활을 꺾고 창을 부러트리며 전차를 불사르셔서 그 땅을 고독하게 하신다.(시편 46) 이사야 예언자는 아시리아 제국의 반평화반생명 제국주의 전쟁위협 속에서 임마누엘 평화를 선포했다.(이사야 11)

무엇보다도 야훼하나님의 평화는 그 시대, 그 땅의 풀뿌리 사람들의 평화행동을 위한 소통과 연대의 길을 따라 온다. 그 시대와 그 땅에서 평화의 사람들이 제국주의 전쟁의 길에 대항해서 닦아놓은 호젓한 평화의 오솔길을 따라 온다. 의심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평화의 왕 예수는 이 땅 풀뿌리 사람들이 닦아놓은 평화의 길을 따라서 이 땅에 왔다.(마가복음 1:1-3, 이사야 40:3-4)

그러므로 시대마다 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클레테손타이 κληθήσονται 불려 질 것이다. 이때 본문읽기에서 사용하는 헬라어 동사는 미래형수동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 풀뿌리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려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1세기 지구촌 제국주의체제의 내부자세력으로써 교회들은 반생명반평화 제국주의 전쟁을 부추기느라 여념이 없다. 가증스럽게도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생떼 같은 생명들의 피 흘림과 죽임 당함을 축복한다. 그런 반생명반평화 지구촌 제국주의 교회들과 교우들을 누가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겠는가? 참으로 21세기 한국교회와 교우들은 세상으로부터 평화를 행동하는 사람들이라고 야훼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려 질 수 있을까?

 

행복하여라, 박해받은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또 팔복선언은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한다. 이때 팔복선언은 디오코 διώκω라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하는데 문자로는 달아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신약성서 속에서는 대부분 사역형으로 쓰이면서 쫓겨나다, 박해받다, 핍박받다라는 뜻을 갖는다. 실제로 시대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시대의 지배체제로부터 억압당하고 착취당한다. 그리고 끝내는 채무노예 나락으로 떨어져 내린다. 히브리 성서에서 히브리 노예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결사체로써 갈릴리 사람들도 가난하고 힘없는 풀뿌리 사람들이었다. 대규모 토지를 독점한 부재지주들의 땅에 매여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소작농들이거나 소작농노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나라가 박해받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나님나라가 갈릴리의 가난하고 힘없는 소작농 또는 소작농노들 안에 또는 그들 가운데 나아가 그들 사이에있다고 선포했다. 갈릴리 사람들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활동과 관계 속에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선언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야말로 예수자신과 갈릴리 풀뿌리 사람들이 함께 벌이는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으로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었다.

한편 팔복선언 끝 단락에서 헤네켄 에무 νεκεν μο(예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 공동체에 불어 닥친 박해상황을 반영했을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출처를 유대인들로 구성된 예수신앙 공동체라고 믿는다. 실제로 마태복음 동아리는 시리아지역에 있었을 텐데, 성서학자들은 서기 80년에서 90년대 사이에 마태복음이 쓰여 졌을 것으로 이해한다.

이와 관련하여 맨 처음 초대교회에 가해진 로마제국의 박해는 서기64년 네로황제의 박해였다. 이어서 서기90년대에 이르러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두 번째 기독교박해가 일어났다. 그밖에도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신생종교로써 유대교로부터 또는 주변 이방인들로부터 매일 매일의 생활박해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팔복선언은 거짓말쟁이들로부터 모욕과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한다. 온갖 사악한 말들로 위협당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한다.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와 같이 박해자들(그들)이 옛 예언자들을 박해했다고 위로한다.

그렇다면 옛 예언자들을 박해한 그들은누구 일까?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계약 전통에서라면, 파라오 노예제국 지배체제이다. 파라오 노예제국에서 부와 권력을 공유하는 지배체제 내부자들이다. 파라오 황실가족, 제사장 등 종교엘리트 그룹, 고위관료 그룹, 귀족과 장로 토호세력들이다. 이스라엘 왕조시대라면, 왕과 성전제사장과 장로와 귀족들이다. 그 땅 풀뿌리 사람들의 생활경제에 빨대를 꽂아서 불로소득을 빨아올리며 장물아비인생을 살아가는 부유한 사람들이다. 예수시대라면, 로마제국과 헤롯왕가와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체제 제사장들과 성전관료들과 장로들과 귀족들이다.

만약 21세기 상황에서라면, 너무도 복잡해서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다. 실제로 풀뿌리 사람들이라 해도 불로소득 대박욕망에 불타오른다면, 주변 모든 이웃들의 생활을 박해하는 사람으로 떨어질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 성서독자들은 예수의 팔복선언 속에서 재구성된 옛 희년신앙 행동법규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아야 한다. 빚 탕감과 채무노예해방, 이자금지와 사회경제약자보호, 사법정의와 사회공동체정의, 쉼이 있는 노동세상, 토지공공성 등이다. 그럼으로써, 21세기 예수신앙인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실체와 진실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은 이천년 기독교역사 속에서 수많은 교회들이 끊임없이 외쳐온 기독교선교 캐치프레이즈다. 그러나 21세기 교회들은 이 땅에서 또는 교우들의 신앙과 삶의 마당에서 벌어지는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참여하고 연대하는 신앙행동에 전혀 나서지 않았다. 그저 교회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저 멀리 피안의 세계로 밀어붙이는 일에 몰두해 왔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죽음이후에 맞이할 피안의 세계로만 선전선동 했다. 그러면서 교우들이 마땅히 이 땅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통하여 누려야할 신앙은총과 행복을 후려쳐 빼앗았다.

 

예수 믿고 교회에 충성하며 이 땅에서 많은 물질축복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십일조 등 헌금을 많이 바쳐야 한다. 그러면 죽어서도 천당에 갈 수 있다.”

 

그러나 일찍이 중세 종교개혁 무렵부터 팔복선언(또는 행복선언)에 나타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려는 기독교 종파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재세례파 또는 메노나이트라고 부른다. 이들의 신앙실천행동은 중세교회에 대한 개혁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초대교회의 신앙과 삶을 복원하는 신앙공동체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원시 예루살렘 예수신앙공동체를 쫓아서 서로의 사유재산을 공유하는 대항세상을 꿈꾸고 행동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들은 종교개혁주의자들과 권력자들부터 무지막지한 탄압을 받았다. 화형당하거나 혹은 옥사하는 등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그렇게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이들은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에 맞서는 예수신앙 실천행동을 끊임없이 이어오고 있다. 이들 재세례파 또는 메노나이트에게 팔복선언(행복선언)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의 알짬이며 알맹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대헌장 전문과도 같다.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야말로 지구촌 제국주의 지배체제 맘몬자본권력에 대항하는 대안세상(Alternative Society)이다.

이제 21세기 한국교회는 이천년 기독교역사 속에서 수많은 교회들이 구호처럼 외쳐온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진실을 새롭게 이해해야만 한다. 지금 여기 예수신앙인들의 삶의 마당으로 짓쳐오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이해하고 기뻐하며 영접해야한다. 지금 여기 예수신앙인들의 생활경제 그늘 안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참여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이 지금, 여기, 이 땅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살아있다는 신앙진실을 증언해야 한다. 21세기 신자유주의 불로소득 자본주의체제에서 옛 히브리들의 희년신앙 행동서사 잇기를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